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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X2]선(S)생님의 시(S)선

개는 훌륭하다를 보다가 '강형욱 훈련사'의 전문성에 감탄하면서 학교와 교사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교사단'의 전문성을 기르자.

by Teachography 2021. 7. 4.

나는 개도 키우지 않으면서 요즘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개는 훌륭하다를 종종 보고 있다. 그리고 유튜브 알고리즘이 그렇듯 한 두 번 보기 시작했더니 추천 횟수가 점점 늘어나서 꽤나 푹 빠져있는 상태가 되었다.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거나 혹은 알고 있더라도 어찌하지 못했던 문제 상황을 강형욱 훈련사가 등장하기만 하면 마치 Marvel슈퍼히어로처럼 척척 해결해 버리는 모습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는 것만 같다.

 

개는 훌륭하다의 에피소드는 종종 유튜브 댓글을 달 수 없게 되어 있다. 유튜브는 시스템 상 다양한 상황에서 댓글을 달 수 없게 자동적으로 조치하기 때문에(대표적으로 아동이 나오는 콘텐츠)) 댓글을 달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의 이유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와 경우를 출연자에 대한 악플이 너무 많이 달리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개는 훌륭하다'에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개들이 많이 나오는데, 상당히 많은 경우 이는 개의 문제가 아니라 보호자의 문제인 경우가 많았으며 그래서 댓글이 달려있는 에피소드의 경우 그곳에는 마치 복사-붙여넣기라도 한 듯 언제나 개를 교육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을 교육시키는 방송이네라는 식의 댓글을 우수수 달린다.

 

202167일 방송에서는 산책을 위해 밖에 나갔을 때 다른 개나 사람들에게 공격성을 보이는 비숑이 등장했다. 개나 낯선 사람을 보면 흥분하면서 심하게 짖자 강형욱 훈련사는 강력하게 통제를 하였다. 그러면서 보호자에게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이기 때문에 반려견이 공격성을 보이면 강력하게 통제하여 그러지 않아야 함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이 때!!!!!!!!!!!! 보호자가 눈물을 보였다. 눈물은 다양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데 이 상황에서 나왔던 보호자의 눈물은 강형욱 훈련사의 강력한 통제에 의해 제압당하는 자기 반려견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눈물이었다.

 

https://youtu.be/WTAY7ct7Wg4

 

뭐지?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나는 개도 키우지 않으면서 저 보호자의 눈물이 어디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자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기 때문은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이와 같은 것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기시감의 원인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것과 같은 눈물을 나는 학교에서 너무나 자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도 이런 상황을 자주 목격한다. 다른 친구들의 고통, 그리고 선생님의 고통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아이의 고통에만 공감하는 학부모들을 매년 목격하거나 만나게 된다. 심지어 자기 아이의 고통에 공감한 자기감정에 매몰되어 학부모가 더 흥분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이렇게 문제에 빠져있는 아이와 그것이 문제라고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학부모는 마치 문제에 빠져있는 반려견과 그것이 문제라고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보호자가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까지 어려움에 빠뜨리는 '개는 훌륭하다'의 상황처럼 심각한 문제를 학교 안에 만들어 낸다.

 

강형욱 훈련사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강력한 통제장치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첫 번째로는 보호자로서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잘못된 생각으로 반려견을 대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보호자의 태도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두 번째로는 보호자의 태도가 변해야 함을 보호자가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 훈련이 중단됨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강형욱 훈련사는 보호자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만약 보호자가 그것에 협조할 생각이 없다면 훈련을 곧바로 중지시키거나 아니면 교육의 효과가 지속될 수 없음을 끊임없이 경고한다. 세 번째로는 보호자가 변화할 의지가 없다면 보호자가 자신의 반려견을 키우지 못하게 된다고 경고하거나 심지어 반려견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음(안락사 등)을 인식시킨다. 훈련을 해도 보호자의 의지나 노력이 부족해서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으면 강형욱 훈련사는 단호하게 반려견이 보호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경고한다.

 

한편, 어느 정도 연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리는 외국의 학교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학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학교에는 강력한 통제장치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첫 번째로는 보호자로서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자녀가 학교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 곧바로 학부모가 학교로 호출된다. 학부모는 학교에서 아이의 문제라고 설명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받는다. 두 번째로는 학부모가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협조하지 않아 문제가 지속된다면 학생의 등교가 곧바로 중지되거나 문제가 일시적으로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변화가 지속될 수 없음을 끊임없이 경고한다. 세 번째로 보호자가 자녀의 문제를 방임하거나 자신의 교육철학을 내세우면서 문제 상황을 개선하는데 나서려고 하지 않을 경우 학교는 단호하게 학생이 학교에 더 이상 나올 수 없음을, 즉 퇴학을 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우리나라와 달리 특히 미국은 현재 다니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경우 엄청나게 먼 거리를 운전해서 통학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실질적인 불편이 생기기 통에 한 블록마다 학교가 있는 우리나라와는 그 경고의 무게감이 매우 다르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형욱 훈련사가 가지고 사용하는, 그리고 외국의 학교가 가지고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통제 수단이 없다. 원래부터 있었는데 요즘에 와서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학교에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든 현재는 없다. 다른 반려견들과 이웃 주민들의 고통과 트라우마에는 전혀 공감하지 못한 채 오직 자기 반려견의 고통과 트라우마에만 반응하는 개는 훌륭하다의 비숑 보호자는 방송에서는 그저 조용히 눈물을 훔칠 뿐이었지만,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만약 학부모라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진다.

 

자신이 가해자의 학부모일 때는 어떻게든 자기 아이의 작은 피해 사실들을 낱낱이 찾아내어 쌍방과실이라고 하거나 혹은 침소봉대해서 오히려 자신과 자기 아이가 실질적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학교의 문제 해결 과정이나 담임의 생활지도 과정에서 꼬투리를 잡아 책임을 떠넘기려고 불을 켜고 달려든다. 교육에 있어서 학교와 담임교사는 도의적으로 무한책임을 질 수밖에 없기에 백 번, 천 번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도대체 학부모이자 보호자인 자신에 대한 자각, 책임감은 망각하고 마치 자신이 제 3자인 양(실제로 조금의 양심은 있었던 것인지 친척이 대리로 와서 난리를 피우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기 아이가 자신의 소유물인양하는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동시에 가해자였던 아이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피해자가 되곤 하는데 그럴 때는 예전에 가해자도 이해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었던 것은 깨끗하게 망각한 채로 이번에는 자기 아이와 가족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가해자가 어마어마한 보상을 해줘야만 하고, 그와 더불어 학교와 교사도 자신들에게 피해 보상을 해야 한다고 악을 쓴다.

 

이와 같은 상식의 붕괴는 개는 훌륭하다.’에 나오는 것처럼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아이에게만 공감하는 태도가 주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에 이런 학부모가 출연하면 강형욱 훈련사처럼 보호자(학부모)’의 태도를 지적하거나 보호자(학부모)’의 변화를 요구하지 못한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학부모는 조용히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통제되지 않은 분노로 학교를 뒤집어 놓는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강형욱 훈련사나 외국의 학교와 우리나라의 학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전문성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강형욱 훈련사나 외국의 학교의 교사는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전문성아래에서 보호자(학부모)’와 만나는 반면 우리나라 학교의 교사는 문제가 많은 후진적 학교 시스템의 하부구조로서 보호자(학부모)’와 만나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의 인식과 사회적 평가가 그러하기 때문에 일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교사들 중에서도 그런 인식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면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그러한 자신은 반성하는 자이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았다고 으스대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우리나라에서 교사는 진짜로 시스템의 하부구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일 수도 있다.

 

21세기의 아이들이, 20세기 학교에서, 19세기 교육을 받는다.’라는 닳고 닳은 말에 감동하여 혁신만을 내세울 뿐 실제로 19세기 교육, 20세기 학교, 21세기 아이들의 정의를 스스로 내려 보거나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교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저 교육전문가가 아닌 자들이 함부로 내려준 정의를 그대로 내면화한 채로 교육전문가가 아닌 자들이 정해주고 시킨 것만 충실히 해가면서 집단 내에서 자신의 위계만 높이려고 하는 교사들이 상당히 많다.

 

키워드는 전문성이다. 당당히 교육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을 강조하고, 학부모의 태도와 방식이 잘못되었다면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꼭 필요한 교육적 조치와 아동 학대를 구분할 줄 모르는 학부모에게 어떤 관점으로 교육적 사태를 바라봐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갈 길이 먼 것이 현실이다. 최근 교육대학교의 커리큘럼은 잘 모르지만 최소한 내가 받았던 교사양성과정과 교사임용과정은 그렇게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전문성을 길러주지 못했다. 그리고 학교라는 곳은 각자도생의 공간이라는 것도 큰 장애요인이다. 일부 학교장이나 몇몇 교육청의 사례들 중 변화의 가능성이 조금 엿보이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경우 교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오롯이 담임교사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교사를 그저 교육시스템의 하부구조일 뿐으로 취급하면서도 전문성과 책임지는 것이 필요한 순간에서는 시스템의 일부로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부끄럽게도 이제야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전문직이 가지는 전문성이라는 것은 뛰어나거나 노력하는 누군가가 혼자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교가 각자도생의 정글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교사공동체’라는 관점보다는 나는 좋은 교사라는 협소한 관점이 지배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언제나 공동체를 이룰 것,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전문성을 굳건히 하려는 노력을 할 것.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학교에-교사들에게 꼭 필요한 혁신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