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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X1]진(S)지한 Teachography

[SX1]"교실에서 찾은 희망" 프로젝트를 하다가 하나의 사건을 통해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과 하류에 머무르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아이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by Teachography 2021. 6. 24.

월드비전에서 매년 실시하는 교실에서 찾은 희망프로젝트에 올해도 아이들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교실에서 찾은 희망 프로젝트는 모두 힘을 모아 행복한 교육을 만들어 가자라는 주제의 노래에 맞춰 반 아이들 전체가 함께 플래시몹을 추고, 그것을 촬영하여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담임 교사인 나는 아이들 앞에서 전제 대형을 점검하는 등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과 더불어 스마트폰으로 촬영도 해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학생들 중 한 명에게 스텝 역할을 부여하여 컴퓨터를 조작하는 역할 등을 나눠서 해야만 한다. 기기 조작 역할을 맡은 아이가 교사의 지시에 맞춰 노래를 틀고 멈추고, 다시 틀고를 반복하면 학급 전체는 이에 따라 연습과 촬영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교실에서 찾은 희망프로젝트를 한참 진행하고 있던 어느 봄날 5교시.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사건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나는 먼저 다른 때와는 달리 오늘은 책상과 의자를 전부 치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솔로 촬영을 할 거라서 작은 무대 공간만 있으면 된다고 한 다음 전체 플래시몹 중에서 솔로 촬영은 어떤 파트인지 간단하게 오늘의 콘티를 안내했다.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스텝 역할을 맡길 학생을 정해야 했다. 아주 무심하게 학생 한 명의 이름을 부른 다음 별다른 설명 없이 선생님 옆으로 나와 보라고 했다. 스텝 역할을 맡길 요량으로 학생 한 명을 부른 것이다.

 

누가 컴퓨터 조작하는 것 좀 도와줄래?”라고 물어보면 자신이 하겠다면서 여러 명이 경쟁적으로 손을 들고 각축전을 벌이거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우르르 뛰쳐나와 아수라장이 펼쳐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누가 하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고 약간 무심하게 그냥 교사가 한 명 선정한 것이다. 오해가 있을 수 있어서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물론 아무나 무작위로 선정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관찰하며 알게 된 성향과 특성을 고려해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아무튼 학생 한 명에게 나와 보라고 말한 뒤 5초 정도가 지났을까? 컴퓨터 파일을 점검하고 있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길래 스텝 역할을 맡기기 위해 호명했던 학생1을 보았더니 여전히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 학생에게서 조금 이상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는 걸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고 벌써 스텝 역할을 맡기려고 하니까라는 이유를 말해 버리면 대신 자기가 하겠다면서 여러 명이 뛰쳐나와 아수라장이 펼쳐지기에 나는 그저 다시 한번 그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선생님 옆으로 와달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 학생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주변 친구들이 오히려 교사인 나보다 더 답답해하기 시작했다. “~, 선생님이 나오라고 하시잖아.”라면서 그 아이의 등을 떠민다. 주변 친구들의 부추김이 점점 강해지는데도 그 아이는 전혀 움직이지 않더니 갑자기 선생님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싫어요.”, “하기 싫어서 안 나갈래요.”

 

.........

사건은 여기까지다. 나는 그 학생1에게 왜 싫은지 물어보지 않았다. 애초에 무심한 어투로 그저 한 명의 학생을 부른 것은 아수라장을 만들지 않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왜 싫은지를 물어보고 대답을 듣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아이를 어떻게든 일어나게 할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그래, 알았어.” 라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고는, 순발력 있게 스텝 역할에 적합한 다른 학생을 또 한 명 골라 그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선생님 옆으로 와 달라고 말했을 뿐이다. 학생2는 교실 분위기를 더 이상하게 만들지 않게 할 정도의 눈치가 충분했기에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자마자 달려 나와서 교사 옆에 섰다. 이렇게 사건은 부드럽게 마무리되었다. 선생님 곁에 온 학생2에게 오늘 촬영을 위해 컴퓨터 조작을 도와줄 수 있냐고 제안하고 스텝 역할을 맡겼으니 말이다. 참고로 학생1은 왜 나오라고 했는지 알게 된 후 뒤늦게 그냥 원래대로 자신이 컴퓨터 조작을 하면 안 되겠냐고 말했지만, 이미 기회는 떠나간 뒤였다.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기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는 훌륭한 학생이라고 여기거나 혹은 반항적인 아이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발짝만 떨어져서 이 상황을 들여다보면 여간 이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사건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면 교사는 그저 잠깐만 선생님 곁으로 나와 보라는 지시만 하였다. 왜 나와야 하는지, 나와서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그저 잠깐만 옆으로 와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나오게 되는 학생의 반응은 뭘까? 아이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인 왜요?”가 가장 일반적이다. 자신이 앞으로 나가야 하는, 또는 나가지 않아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와 동기가 필요했다면 교사에게 나오라고 지시하는 까닭을 물어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3학년 2학기 후반부터 아이들은 교사의 지시에 대하여 왜요?”라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왜요?”가 아니라 싫어요.”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뭐가 싫다는 걸까? 교사 곁으로 나가야 되는 것이 싫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귀찮아서 가만히 있고 싶은데 나오라고 해서 기분이 나빴을까? 예민해져 있는 감정을 교사의 무심한 말투가 자극하여 부아가 났을까?

 

물론 모두 맞을 수 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일 수는 없다.

아니, 단언컨대 모두 아니다.

 

이유는 자명하다. 자신이 솔로 촬영의 첫 순서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첫 발표순서에 대한 부담감, 긴장감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한 순서 정하기활동을 진행한 뒤에 학생1의 이름이 호명되었다면 첫 순서가 자기라는 오해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교사의 지시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선행활동 없이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상황이 학생1에게 자신이 첫 순서라는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 그냥 그렇게 이해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황상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은 첫 순서라는 말을 전혀 한 적이 없고, 학생은 나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물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일은 학교와 교실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아주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교육의 장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오늘 같은 일의 경우 학생 한 명이 몸을 움직여서 나와야 했기에 그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일 뿐, 알아차리지 못하는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글씨를 바르게 써서 공책 정리를 하라고 교사가 수업 활동을 이끌었다고 해 보자. 그러면 학생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린다. 공책을 정성 들여 정리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지, 자신이 들여야 하는 노력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 빠르게 판단한다. 선생님이 제시하는 활동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가늠해 보고 할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더 크다고 결론을 내리면 아이들은 그 순간 눈을 감고 등을 돌린다. 그리고는 당당한 얼굴로 일갈한다. “재미없어요.”, “몰라요.”, “이해가 안 돼요.”, “저는 원래 이런 거 안 좋아해요.”, “지루해요.” 또는 조금 더 소극적으로 대충하거나”, “빨리 해치워버리거나”, “짜증을 내면서활동을 해낸다. 이런 행동을 주체성이 높다고 띄워줄 수도 있겠으나 주체성을 얻는 대신 학생이 잃는 것은 무엇인지도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박동섭 교수님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의 복잡다단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르치는 사람이 홀연히 나서고 난 다음 단계는 배우는 자가 움직일 단계이다. "내가 지금부터 무엇을 배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아니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무엇을 알고 싶은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한번 배워보겠다"는 어떻게 보면 별 이유같지 않은 이유이지만 그래도 뭔가 재미있을 것 같다. 뭔가 미지를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감각으로 그 깃발 아래 모여봤다.

그런데 한참 배우다 보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한번도 뇌리에 떠올리지 못한 욕구, 욕망, 동기 흥미, 관심사 그리고 한번도 뚫어보지 못한 사고의 회로(아니 뚫고 싶은 사고의 회로가 있는 것 조차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가 있다는 사실을 사후적으로 발견하는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배우게 될지, 배우고 나서 얻게 되는 건 무엇이 될지 미리 판단해서 결론을 내리고, 그 과정에 들여야 할 노력, 시간 등의 비용을 비교해 본 뒤 배울지 말지를 결정하는 행위는 주체성 높은 현명한 행위가 아니라 배움이라는 시스템을 작동불능으로 만드는 위험하고 건방진 행동의 다름 아니다. 주체성 운운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음악수업 가창 시간에 노래를 부르는 척만 하고, 미술 시간에 붓을 휘갈겨 몇 초 만에 다 그렸다고 끝내버리고, 체육 시간에 몇 발짝 범위 안에서만 맴돌거나 5번 반복해야 되는 상황에서 1번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작문 시간에 알아보기도 힘들게 글씨를 흘려서 순식간에 끝내버리고, 수학 시간에 모르겠다면서 버티고 앉아있고, 과학 시간에 실험 도구로 장난만 치고, 사회시간에 신문을 대충 만들어버리는 것 모두 건방짐의 결과라고 봐도 무방하다. 멍청하거나 게으르거나 불성실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는 자기 자신이 효율적인 선택을 하고 있으며 성실하고 똑똑한 자세로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선생님이 이런 아이들을 붙들고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게 만들기 위해 효율성, 경제성으로 무장한 이야기를 아무리 하려고 해 본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교사가 아무리 더 논리적인 말을 하더라도 아이는 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미 굳어진 자기 나름의 판단 기준을 자신감 있게 다시 꺼내 가지고 저울질을 시작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너무 답답한 마음이었다. 이해가 가질 않았다. 배우는 과정을 함부로 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굳이 왜 저렇게 배우는 것을 막 대할까? 왜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 좀 더 해보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행동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지독할 정도로 성실함의 결과였던 것이다.

 

 

내가 먼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실감을 제대로 느끼고, 관점을 바꿔서 성실한 아이들을 그 성실함을 다른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좀 더 간절함을 담아 아이들 앞에 서는 것으로 바뀌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