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시작!
이 글은 "김영욱 님의 퍼시스턴트 라이프" 서평이 맞습니다만...일단, 냅다 다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본다.
1. 정영진, 최욱의 불금쇼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는 팟빵이라는 플랫폼을 기반으로 업로드 되는 예능프로이다.(이하 매불쇼) 공중파가 아닌 예능이기에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과장, 희화화, 왜곡이 양념처럼 요소요소에 가미되어 있다. "매불쇼"에서 가끔 학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나 자신이 "교사"라서 그런지 몰라도 자극적인 양념질에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진지해지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링크한 에피소드에서는 교권 침해 사례가 소개한다.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나이가 어리고 키가 작은 여교사가 학교에서 겪었던 일화들을 기록한 분노 일지에 관한 내용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학생에게 양손가락을 올리는 욕설을 받았다.
수업 시간에 휴대폰을 하는 학생의 휴대폰을 뺏었더니 반항하면서 선생님의 휴대폰을 뺏어서 던져버렸다.
수업 시간에 발표를 시켰더니 "아이 x발, 뭐래."라는 욕설을 했다.
생활지도를 하려고 하면 "어쩌라구요?"라면서 반항하고, 혼내려고 하면 "영상을 찍겠다"면서 협박한다.
전달사항을 말하고 있으면, 뒤에서 다 들리게 자기들끼리 "야, 담임 방금 뭐래."라는 식으로 조롱하는 말을 했다.
등등
이 일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순서에서 MC 중 한명인 "정영진"님은 이렇게 말한다.
크게 보면 이제 "20세기 교육 시스템"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이게 우리에게 '유효'하지 않다. 옛날에는 전쟁에 필요한 사람을 교육시키는 곳이 학교같은 것이었고, 그보다 더 옛날에는 나름 공자, 맹자 말씀 가르치는 곳이 학교였지 않느냐. 지난 100년간 산업화 시대의 균질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곳이 학교였다. 직장이나 기관 같은 곳에 들어가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들을 길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런 인간들을 길러낼 필요도 없고, 우리 사회가 원하지도 않는다. 이제 학교는 자기들이 듣고 싶어하는 수업 정도만 나와서 듣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학교에 나오지 말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하게 하자. 최근에 일어나는 문제라는 것들이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시키려다 보니까 생기는 문제"이다.
옛날에는 학교말고는 배울 곳이 없었지만, 이제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책이나 유튜브로 얼마든지 스스로 배울 수 있으니 학교는 필요가 없다. 학교에서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나오고, 배우고 싶은 것이 없으면 나오지 않게 하자.
...허허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매불쇼는 예능프로이다. 심지어 이 이야기가 나온 코너는 "보도본부"라는 꽁트이다. 굳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정영진님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니 그냥 웃고 넘기는게 정신건강에 이롭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허탈하다. 마음 한 구석이 휑해지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교육"을 바라보는 빈곤하고 얄팍한 관점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학교는 현 시대에서 이제 그 유용성을 상실했다라.....
학교라는 한 단어로 퉁치고서 학교가 시대에 뒤쳐져버렸다고 말해도 괜찮을 정도로 학교는 단일한 기능만 있는가?
좀 더 정확하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학교"라는 것으로 뭉뚱그리지 말고 구체적인 대상을 특정해서 문제점들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학교의 모든 기능이 무용해졌다고 해도 될까?
아니, 애초에 학교의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성찰, 돌아보기는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무엇무엇의 수단, 도구로서의 "교육"이 아닌 "교육 그 자체"의 본질, 목적, 지향점 등에 대한 것들을 한번도 음미해 본 적 없는 자들이 내뱉는 메마른 말들에 정색하지 않을 수 없다.
"보도 본부"라는 꽁트에서 정영진님이 맡은 역할은 남들과는 다른 "새롭고 신선한 관점"의 제시이다. 하지만 '교육은 이제 그 유용성을 상실했다'라는 이번 비판은 너무나 식상하다. 아니, 도대체 '100년전 산업화시대의 공장 노동자를 찍어내는 곳이라는 학교교육 비판론'이 언제적 비판인데, 판박이처럼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20년도 더 된 해묵은 비난을 녹음기 틀듯 반복한단 말인가? 정말 그 정도로 학교의 관성이 엄청나서일까? 학교는 100년동안 요지부동한 채로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애초에 글러먹은 시스템이라 가망이 없는건가?
내가 요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하는게 있다. 지금의 학교가 문제가 많다는걸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 교육이 변하지 않고 낡아빠졌다면 그건 학교 자체라기 보다는 학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 비판의 논리, 언어꾸러미들이 더 심각한 상태라는 것이다. 100년동안 바뀌지 않는 학교가 끔찍하다며 학교에 대한 비난의 말을 하기 이전에 몇 십년째 같은 지적질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 비판의 언어꾸러미들 역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학교는 지금도 바뀌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진화한 상태라 20년째 같은 논리로만 반복되는 학교 비판론이야말로 그 유용성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공교육 기관의 효용이 사라졌다고 한다면 유효기간이 훌쩍 지나버린 바로 그 '기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대학입학자격시험 준비, 대비기관으로서의 기능이다.
그럼 학교의 수능준비 기능은 왜 그 유용성이 상실되었을까?
또 답은 간단하다. 서열화된 대학이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었던 고소득 직업 획득의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기 때문이다.
그럼 믿음직한 직업 양성소로서의 대학은 왜 고소득 직업 획득을 더이상 안정적으로 보장해 줄 수 없게 되었을까?
또또 답은 간단하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예측 불가능해지는 한편 양극화가 심화되고 공정과 정의가 무너지면서 자본의 가치가 인간존엄성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아직까지도 고소득과 안정성이 보장되는 극소수의 직업들에 대한 경쟁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고, 더 이상 대학이 "보장성 높은 직업양성소"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기는 역부족이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여전히 대학밖에 기댈 곳이 딱히 없기에 고3 수험생과 그 가족들, 미래의 고3 수험생과 그 가족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학입학자격시험 준비에 온통 매몰되어 있는게 현실이다. 서열화된 대학구조와 그로 인한 입학경쟁의 심화, 일그러진 초중등 교육을 쓰레기통에 던져야된다고 주장하는 건 자신의 가족이 대입경쟁이라는 좁은 문을 성공적이든, 쓰다린 실패로든 통과한 이후이다.)
이런 상황에서 던져야 할 물음은 무엇어야 할까?
학교 시스템은 이제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물음일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학교 시스템의 유효기간이 다 되었다는 주장이야말로 학교를 기형적으로 뒤틀어버린 주범 중 하나인 "대학입학자격시험 준비기관으로서의 학교"라는 관점을 아무 비판없이 수용하여 내면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대한 비판이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할 때 "학교 시스템은 이제 끝났다."라는 언설은 그런고로 교육 담론의 장에서는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교육 시스템=학교는 이제 끝났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학교의 본질적인 기능은 무엇인가?"
"교육의 본래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성장이란 무엇인가?"
등등.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고, 아니 애초에 물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거나 아예 물음에 필요한 어휘꾸러미조차 갖고 있지 않은 "매불쇼의 정영진식 담론"을 하는 "얼치기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에 넘쳐난다. 제2의, 제3의 정영진은 앞으로도 계속 출몰할 것이며 당연히 선대의 정영진도 숱하게 존재해 왔다.
교육 담론의 장에 우글거리는 "얼치기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바는 "학교와 가정의 분리"이다. 나는 학교의 학생들을 매일 만나면서 점점 학교와 가정 사이에 높은 벽이 세워지고 분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 학부모와 학생들은 공부(원하는 평가결과를 획득하기 위한)는 각각의 개인이 "가정이든, 사교육기관이든" 알아서 방법을 찾아 하는거라 여기는 것 같아 보인다. 학교는 그 과정에서 별다른 영향도 끼칠 수 없고 끼쳐서도 안 되며, 그렇기에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교육 시스템이 문제라서 그걸 뜯어고쳐야 된다는 의견이 나오면 동의한다고 말하면서도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괜한 손해와 피해를 볼 수 있으니 일단 자신이 기존 시스템의 막차를 타고 떠난 뒤에 자신은 빼고 자기 이외의 사람들이 문제를 잘 해결해 내기를 바라는 것으로 여겨진다. 근데 그런 식이라면 지금의 학교 시스템이 문제라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말해도 괜찮은건가? 뭐 어쨋든 이 모든건 끊임없이 "학교는 무가치하다"라고 얼치기 전문가들이 사회를 향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반복한게 분명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요즘 학교는 생활지도나 심지어 학습지도를 위해 방과후에 따로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기 힘들다. 학원이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상담은 당연하고, 무언가 학교행사를 하는 중에도 학원가야하는 시간이 되면 모든 것이 중단되어야만 한다. "저 학원 가야 하는데요?", "우리 애 학원 못 가면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한마디면 끝이다.
방과후에만 그런 것일까?
학생들은 학교에서 하는 활동이나 학교숙제는 하지 않더라도 학원숙제는 어떻게든 해낸다. 시간이 부족하면 일과 중 쉬는시간에, 그것도 부족하면 심지어 수업시간에까지 하려고 한다. 공부는 중요하다고 동의하면서도 공부란 곧 학원 수업과 학원 숙제이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나름 잘 헤아린 행동이다. 학교는 학원 수업 전에 여러 친구와 부담없이 만나거나 문제풀이에 집중하는 학원 수업의 피로를 달랠 놀이를 하는 장소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하면 너무 자조적인 걸까?
얼치기 전문가들의 '진단과 해법'에 이리 휘청, 저리 휘청대며 흔들리는 학교를 바라보며 답답함만 커져 간다.
2. 퍼시스턴트 라이프
하필....이런 때에 김영욱님의 퍼시스턴트 라이프 라는 책을 만났다. 책 제목과 더불어 표지에는 "절대 굴하지 않고, 꿈을 향해 끈질기고 집요하게 나아간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묘한 불안감이 내 안에서 커져갔다. '얼치기 전문가'들이 학교 무용론을 펼쳐나갈 때마다 주로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꿈, 진짜 나, 진정한 나, 나다움, 정말로 내가 원하는 삶, 진짜 재미를 느끼는 일, 가슴이 두근거리는 활동" 따위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우리 교육에 섣부른 질책과 성급한 해법을 하사하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도 얼마든지 학교 무용론은 강화될 수 있다. 본인이 이룬 성취는 온전히 자신이 노력한 결과이며 그 과정에서 학교는 오히려 장애물이었고 방해만 되었다는 스토리텔링 따위로 말이다. 과연 처음 만난 "퍼시스턴트 라이프"의 표지에서 느낀 기시감은 현실이 될런지, 아니면 기우일지 걱정 반-기대 반으로 책 속을 질주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나의 걱정과는 거리가 있는 책이었다. 자기 성취를 훈장삼아 우리 교육에 함부로 훈장질하는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참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책은 "김영욱"이라는 한 인간의 "자서전"이다. 동시에 근래에 본 것중에 가장 세련된 "제품광고" 즉, 마케팅이다. 김영욱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트로마츠 개발"이라는 목표를 향해 어떤 고난과 역경을 뚫고 도달했는가하는 이야기를 통해 "트로마츠"에 네러티브를 만들어 제품에 대한 호기심, 관심, 호감, 선망 등의 감정을 유발하고 그 기분이 곧장 구매로 연결될 수 있게 하고자 한다. 실제로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인터넷 검색창에 "트로마츠 칫솔"을 입력하는 일이었다. 마켓팅 효과가 대단하다.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뒀는데... 아무래도 곧 사게 될 것만 같다....
한가지 의아하게 생각한 부분을 하나 일단 바로 언급해야겠다. 이 책은 자서전이기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조금 지나치게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의대 입학"이라는 본인의 주요 성취물과 "의대 자퇴"라는 다른 의미의 주요 성취물을 무려 자서전의 약 30~40%를 할애하여 풀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자서전으로서 자신이 어떤 인간적인 고뇌의 과정을 거쳐서 성장했는지 이야기의 토대를 다지기 위해서는 "의대 입학-자퇴" 스토리텔링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래와 같은 에피소드가 이야기의 시작이라는게 문제이다.
약 2개월간 조지아공과대학에서의 해외연수 기간 때 일이다. 홈스테이 호스트인 유대인 객원 교수와 함께 참석한 문학 토론회 행사에서 나는 교수이거나 연구원인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누구도 내게 "왜 의대를 그만두었어?"라고 묻지 않았다. 미국 연수를 가기전 수년간 '의대를 그만둔 이유'를 답하느라 상당한 시간을 써야 했기에 언제 어디서든 합당한 답을 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나의 선택에 대한 비판과 비난없이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와 존중을 보여주었다.
이 에피소드부터 "김영욱님의 자서전"이 출발한다. 이후에 나오게 될 미국 유학생활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는 일종의 '복선'이라면 '복선'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둥하였다.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태도는 그야말로 '편견 없이 우호적'으로 타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앞으로의 가능성도 진심으로 높게 평가해주는 것인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태도는 '무례한 조언하기, 치기 어린 도전이라며 비난하기, 주제넘는 걱정해 주기'라고 서술하는 것이 "의대 입학-자퇴"라는 소재를 다루는 이후의 논조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대 입학-의대 자퇴"라는 것을 자신이 이룬 성과들 중 대단히 의미있는 하나라고 규정하는 한편,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한국만의 분위기라거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성숙함이라기보다는 다름 아닌 본인 자신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일단 책의 약 4분의 1이상에서 반복적으로 "의대 입학-의대 자퇴"라는 것이 주요한 이력 또는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성취 중 첫번째로 언급되면서 더욱 더 "의대를 그만둔 이유를 집요하게 물어오는 것"을 가장 원했던 것은 본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강해졌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선입견(좋은 편견이든, 나쁜 편견이든)을 가지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지금 모습을 바라봐주고 동시에 자기 배경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비전과 목표를 보고 내재된 잠재력을 믿어주길 바란다면 자기소개를 할 때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그리고 사람들의 주제넘는 걱정과 조언이 자신과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해결방법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해야할 건 굳이 이전의 이력, 성취 따위를 자세히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의 작가 김영욱님의 경우라면 "의대 입학-자퇴 이야기"를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우리나라도 그 정도의 성숙함에는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일부러 숨기는 것이 아닌 굳이 말하지 않은 이력은 언제가는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이라 아깝게 사라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 사람이 굳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 사정이 있을거라 미루어 짐작하여 사람들이 그 이력을 더 소중하게 다뤄준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양 수준은 절대 낮지 않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의대 입학-자퇴"를 도전자-개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상징하는 징표로 앞세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앞세우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자서전"의 성격이 강한 스토리텔링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자서전의 첫 시작이며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조지아공과대학 해외연수" 에피소드에서 미국 지식인과 커뮤니티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굳이 사람들이 "의대 커리어"를 대하는 자세로 풀어내지만 않았다면 나역시 별다른 위화감 없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보니 책을 읽는 시작에서부터 의아함을 품게 되었고 책을 더 읽어 가면서 내 마음속에 있던 의아함은 순간 우려스러움이 되었다.
내가 우려스럽다고 생각한 부분은 "의대 입학-자퇴"가 꽤 대단한 이력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중반 부분 쯤에서 "의대 입학-자퇴"를 왜 이렇게 주요 이력으로 설정하고 있는가를 납득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을 늘 도전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사람으로 규정한다. 이 때 도전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을 높이려면 그 도전이 쉽지 않은 것이어야만 한다. 아무도 가지 않거나 누구도 쉽게 생각해내지 못한 것을 추구할 때만이 도전은 위대해지고 성장지향성과 적극성에 설득력이 부여된다.
유학 생활을 통해 한단계 성장을 이뤄낼 때쯤 이 책의 저자는 스스로 '우월감의 원천(의대생이었다는 것, 서울대학교를 우등조기졸업했다는 것, 미국 명문 주립대학교의 유학생이라는 것)'을 떨쳐내고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성과를 통해 자신을 증명해 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부분을 읽고 '아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의대 입학-자퇴" 커리어의 비중이 커야만 하는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 "의대 입학-자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그걸 떨쳐냈을 때의 드라마틱한 효과가 줄어들었을 것이고, 우월감의 원천들을 떨쳐내어 한단계 성장을 가능케한 자신의 통찰은 빛이 바랬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론이다.
아무튼 이유도 추정해 보았고 현실적으로 "의대 입학-자퇴"라는 것이 범상치 않은 일이라는 건 사실이라 오히려 내가 오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려'를 하나 남기고자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의사'를 병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공부에 조금만 소질을 보인다면 너도나도 일단 의사가 되려고 시도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담임으로 있는 반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조금 과장해서 거의 모두가 장래희망으로 '의사'를 말한다. 예전에는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류의 낭만적인 대답을 되고 싶은 이유로 말하는 학생이 다수였다면 지금은 노골적이면서도 자랑스럽게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부모님이 돈 많이 버는 직업이 최고라고 해서"라는 것을 되고 싶은 이유로 말한다.
성장가능성이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어린 시절에 오로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확실한 직업", 그 중에서도 의사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만 잠재력을 키워가고자 하는 것이다. 의사라는게 돈을 많이 버는 직업임은 당연하고, 의사의 일이 보수를 많이 받아야할 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수많은 사회적 역할(직업)에 등급을 부여하고 그 중 상위 등급으로 의사를 설정한 뒤 그걸 당연히 찬양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 심각한 일이다.
나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해 본다. 작가가 '의대 입학-자퇴' 부분의 비중을 얕게, 좀 더 욕심을 내보자면 평가 절하하거나 의대생이었다는 커리어를 완전히 거둬낸 스토리텔링을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상상 말이다.
정치이야기인듯 해서 조금스러운데 대한민국 제 20대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후보인 이재명씨가 인권변호사가 된 이야기가 불연듯 떠올랐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에 있던 시절 청년 이재명은 검사로 임관을 해야 할지 인권변호사로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신념대로라면 인권변호사를 선택하는게 맞지만 20대 후반인 사회초년생이 직업전선에 곧바로 뛰어들어 제대로 먹고 살 수나 있을까하는 현실적인 걱정에 망설이게 되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변호사 영업에 "전관"이라는 이력이 큰 도움이 되니 1~2 년만이라도 검사 생활을 한 뒤 변호사를 해도 늦지 않다는 조언을 하는통에 더욱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당시 변호사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사법연수원에 강연자로 와서 했던 한마디 말 덕분에 더이상의 고민을 멈추고 인권변호사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말인 즉슨, "변호사는 절대 굶지 않는다"였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 일찍 성장가능성을 방향짓지 않길 희망한다. 안테나를 있는 힘껏 열어젖히고 세상을 자기 안으로 온전히 끌어안는 경험을 풍성하게 했으면 좋겠다. "돈"은 분명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 밖에 중요한 것들도 많다. 2021년 대한민국은 돈 이외의 다른 가능성들은 일찍이 싹이 잘린채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주마같다. "의사"만을 병적으로 추구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사는 절대 굶지 않는다."같은 말처럼 다른 가능성을 향해 돌아서게 하는 용기를 북돋는 문장들이 이 책 "퍼시스턴트 라이프"에는 있는가? 아니면 기존의 관념을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견고하게 할 뿐일까?
3. 발명가의 시대
나에게는 스타트업을 여럿 옮겨다니는 지인이 있다. 교사로서 인간관계가 매우 제한적이라 학교 밖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나는 늘 호기심 가득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너무 내밀한 것까지 물어보는 것은 당연히 실례라서 보통은 겉만 훓게 되지만,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지인은 다행이 친한 친구라서 꽤 많은 걸 묻고 답을 들으며 깊은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스타트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적은 봉급에 매우 강한 강도의 노동을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들 '꿈'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강도에 비해 낮은 봉급은 스톡옵션 등을 통해 회사의 주식을 약속받는 것으로 감내하고 직원들 모두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려고 고군분투 중이라는 설명이었다.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애사심에 기반한 회사의 성장?
프로젝트 성공을 통한 개인의 가치증명?
아무래도 친구이다 보니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스타트업 구성원들 모두의 꿈은 "주식 상장"이라고 말이다. 오로지 그것 한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한다.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세련된 마케팅과 고객과의 적극적인 피드백으로 제품을 개선시켜나가면서 실적을 올려 높은 매출에 도달한 뒤 결국 "주식 시장"에 "상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이고 곧 이뤄낼 거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주식시장에 회사가 상장이 되기만 하면 회사 주식을 이미 나눠가지고 있는 자신들은 엄청난 자산가로 바뀌게 되어 있다면서 황금빛 청사진을 내놓는다. 현재의 자기 자산이 주식상장으로 인해 한번만 뻥튀기가 되면 그 이후로는 만나서 어울릴 이웃들의 '수준', '계급'이 달라지게 된다면서 그 때를 기약하며 현재의 인간관계에는 큰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친구를 응원해주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인이 돈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돈에 관심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의심스러운 일이다. 주식회사도 주식상장도 불법도 아니며 뭔가 구린 일도 아니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근간이라고 불러야 할 핵심적인 발명품이다.
문제는 자신들의 행위를 꿈, 도전, 성장 따위의 단어로 포장하려고 할 때 발생한다. 스타트업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위대한 도전이라느니, 꿈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라느니 하는 순간 애매해진다.
퍼시스턴트 라이프에서는 꽤 많이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최초'라는 단어이다. 예를 들어
"내가 최초로 해낸다면 그야말로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는 공학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내기만 한다면 내가 최초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내가 최초가 될 가능성이 월등히 크다!"
"세계 최초 기술을 개발했다는 데 스스로 대단히 고무된 날들이었다."
"기술 특허를 가진 창업으로 차별적 경쟁 우위에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최초의 이점은 무엇일까? 미지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성취감같은 낭만적인 걸 느낄 수 있다는 아니지 않을까? 그보다는 바로 배타적 권리, 즉 독점 구조를 완성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독점 구조는 천문학적 부를 축적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스타트업에 있는 사람들이 최초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독점 시장을 구축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야 경쟁에서 살아남는 걸 넘어 군림할 수 있게 될테니까 말이다. 그로 인해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 주식 상장이 될테고 주식 상장이 되면 갖고 있는 자산이 뻥튀기 되는 것은 물론, 주식회사가 되었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자금을 운용하여 수익구조를 잘 유지해 나가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고 가치중립적인 위와 같은 행위들을 설명하면서 성장을 지향한다고 해버리거나,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에 끌렸다고 하거나, 꿈을 향해 나아가면서 어려울 일도 과감하게 도전해 왔다고 해버리는 건 나는 좀 우려스럽게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이다. 감히 대상화하지 못하는 것 없이 모든 걸 대상으로 바라보는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는 심각한 수준이다. 돈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꿈'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거나 나의 연봉이 상승하고 회사의 매출이 올라가는 것에 '성장' 이라는 단어를 정말 붙여도 되는 걸까?
안 그래도 지금 아이들은 돈이 곧 꿈이고, 꿈이 곧 돈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돈에 '천박'이라는 꼬리표가 조그마하게 붙어있어서 약간 주저함이 있었다면 이제는 꼬리표가 '꿈, 도전, 성공, 성장, 좋은 것'등으로 바뀌면서 아예 장래희망 자체를 '돈 많이 버는 사람', '건물주'라고 당당히 그리고 확고하게 말하는 아이들이 많이지고 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하나의 원인으로 '꿈, 성장, 도전'이라는 단어가 너무 함부로 '돈 많이 버는 것'을 긍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일거라고 생각한다.
발명가의 시대가 계속된다고 한다. 나는 지금 우리 시대의 발명가들과 미래 시대의 발명가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너무 섣불리 "성장을 추구한다"라거나 "꿈을 향한 도전"이라고 포장하지 않길 희망한다. 그냥 많이 팔리는 제품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던가 경쟁제품을 뛰어넘는 제품을 출시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정도로만 완곡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꿈을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물질주의"에 매몰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그에 따른 어려움을 헤쳐나갈 용기를 발견하게 될까? 아니면 딴 건 관심없고 그져 트로마츠 칫솔이 과연 대박이 났는가 아닌가하는 참 일관된 물질주의에 끌릴까?
그나저나 일단 "트로마츠 칫솔" 주문부터 하고 더 생각해 봐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