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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X3]서( S)평 쓰(S)는 선(S)생님

[SX3]부캐는 크리에이터, 본캐는 선생님의 디지털 전환 교육담: 학생들이 더 좋아하는 수업의 디지털 전환 - 아니 근데... 트랜스포메이션이 아니라 이노베이션이 아닌 이유는 뭘까? 다른 건 다 ..

by Teachography 2021. 12. 24.

서평 시작!

1. 제목 하나 가지고 너무 뭐라고 해도 되나 몰라

 

수많은 곳에 제목이 붙는다. 사물에 이름이 있듯... 제목은 어찌보면 '그것'의 이름이다.

'그것'에 대해 판단할 때 제목은 중요한 요소로 취급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제목은 그저 제목일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 흔한 일이지만 종종 어떤 경우는 제목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제목, 즉 이름은 '그것'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본질을 제목이 대표해서 보여주기에 제목은 강렬하게 인상에 남는다.

 

반면 어떤 경우는 제목 때문에 큰 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요즘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수많은 컨텐츠들이 소위 제목장사라고 해서 어그로(aggro)성 타이틀을 내걸고 클릭을 유도하는게 점점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익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뒷광고나 논란을 일부러 만들기 위한 자극적인 제목의 몇몇 '그것'들이 도드라져서 그렇지 여전히 수익창출을 주요 목적으로 하지 않는 분야에서는 제목은 그저 제목으로만 그 자리에 있을 뿐 대부분의 경우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 넘어가는게 일반적이다.

 

결국 제목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결론이다......만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제목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지엽적으로만 천착하는 추태일지라도... 역시 이야기 하지 않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학생들이 더 좋아하는 수업의 디지털 전환
부캐는 크리에이터, 본캐는 선생님의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 교육담

 

이 책의 제목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1인 크리에이터의 시대이다. 특히나 상상도 안되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일확천금의 사다리가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세계의 곳곳에 주인없이 널부르져 있다고 소문이 널리 퍼지는 한편, 심지어 여전히 블루오션이라 일단 뛰어들어 아무거나 먼저 줍게 되면 임자인 분위기까지 넘실대면서 1인 크리에이트 카테고리는 무한확장 중이다. 게임, 먹방, 정치, 주식, 각종 취미를 넘어 소소한 사회이슈까지 닿아 있지 않은 분야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그런데... 인기 급상승의 바로 그 크리에이터를 부캐로 한다고 제목은 쓰고 있다. 사람을 홀리기에 충분하다. 점입가경으로 본캐는 선생님이란다. 대 크리에이터의 시대에 그 흔한 유튜브조차 '겸직허가' 및 '신고'를 해야 하고 '수익창출'도 제한적인데다가 투명하게 공개한 뒤 점검받아야 하는 '선생님'이 본캐인데... 부캐가 무려 크리에이터인 모범사례가 있다는 것은 '진짜' 선생님이라면 더더욱 매혹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뭔가 두근거리는 마음과 기대를 한껏 품은채 책의 표지를 넘겼다. 습관처럼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역시 작가 이력이다. 아니 그런데!!!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급실망했다. 아니... 왠지 모르게 사기를 당했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작가는 '선생님'이 아니라... '치과대학 교수'였던 것이다...

 

 

선생님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 모두를 부를 수 있는 일반명사일 뿐일까?

 

선생님이라는 명칭은 직업이 '교사'인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당연히 아니다. 현실에서는 학교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을 교사가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행정업무인력, 급식실 조리사 등도 전부 호칭의 구별없이 '선생님'으로 통칭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일종의 존칭으로 교육과 전혀 상관없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범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을 소개하는 상황에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단어로서의 '선생님'은 그 사용자가 분명 한정적이다. 남들에게는 경칭으로서 '선생님'이라고 불리더라도 자기 자신은 본인을 소개할 때 아무렇게나 '선생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면 그래서 보통 '교사'를 떠올리게 된다. 학교급이나 학교의 종류가 어디냐는 문제만 남을 뿐 "저는 선생님입니다."라고 하면 '교사'겠거니 하는 것이다.

 

제목에서는 본캐가 선생님이라고 했다. 당연히 초등교사나 중등교사 정도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교수'라니...

표지에서 선생님이라고 해놓고 교수라니...

 

 

가르치는 일(교육)을 중시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는 표현으로 제목에 선생님이라고 쓴 걸까?

 

'교수'면서 제목에는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표현한 이유에 대한 다양한 가설을 생각해 보는 건 별로 어렵지는 않다. 대학 병원의 교수가 담당하는 임상-연구-교육이라는 3대 업무 중에서 작가 본인은, 많은 경우 소홀해지기 쉬운 교육에도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서문'에서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하고 있는 강의를 미래적으로 바꿔 대학생들이 수업에 열중하고 몰입할 수 있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을 '선생님'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면 뭐... 별로 어색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학교급에 따라 그것이 그대로 계급화되어 교사보다 높은 신분으로 통용되는 '교수' 스스로가 자신을 '선생님'으로 규정짓는다는 것이 '탈권위'의 모범사례로 홍보되는 효과를 가져올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사회의 교수 문화가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교수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가 한소리 듣고 교수님이라고 정정해야 했던 스토리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현 시점의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교수와 교사는 엄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바로 만나는 학생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논쟁거리가 있어서 '전제'로 삼고 있는 '교육관'에 따라 달리 볼 수도 있겠다는 걸 인정하면서 말해보자면, 교수는 '성인교육'을 하는 자이고 교사는 '아동-청소년교육'을 하는 자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동을 '작은 어른'으로 본다면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어진다. 배우는 내용이 다를 뿐 교수와 교사 모두 훌륭한 교수법과 멋진 교육도구를 비슷하게 응용 및 활용해서 학생관찰과 정규수업을 진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근데, 정말 인간이 그런 존재인가? 기계처럼 크기만 다를 뿐 작동원리는 똑같으니 똑같이 취급해도 되는걸까?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이다. 단순히 몸의 부피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커지는게 아닐 것이다. 태어난 아이에게 곧바로 '갈비찜'을 먹여서는 안 되듯 성장하는 과정에서 매순간마다 필요한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아니 만약 아동과 어른의 차이가 그저 부피뿐이라면 굳이 왜 배우는 내용은 달라야 하는가? 아동이 작은 어른일뿐이라면 선행학습-선행학습-선행학습으로 빠르게만 지식을 익혀도 되는가? 대학생과 같은 것을 배워도 아동이 따라만 온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할 것인가? 보수와 처우 때문에 현실에서 일어날 일은 없지만, 만약 수학과 교수가 초등학생에게 초등수학을 가르치면 최고로 잘 배울 수 있을텐데... 라고 말하던 사람들이라면 뭐 그렇다고 이야기할테지만... 그런 식이면 안되지 않을까? 단순히 지식에 위계가 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는 초급의 지식을 배우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올라가면서 단계를 심화시키는게 아니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즉 지식의 위계가 아니라 '인간 성장의 단계'가 있기 때문에 배움의 단계와 내용에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 아닐까?

 

 

교육은 '선생님과 학생의 만남'과 '그로 인한 성장'의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 학생이란 존재는 성장해 나가며 매 순간순간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한다. 새롭게 변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필요로 한다. 그 변화의 모습을 한 두번의 관찰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특정구간을 반복해서 경험하다보면 깊이가 생길 것이다. 반복해서 만나는 대상(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등)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치가 쌓이게 된다. 물론 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여러 개의 골을 형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학교급을 넘나들며 만나는 학생이 바뀔 때마다 그에 맞는 경험치를 소환하여 적합한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학교급의 범위가 다소 달라질 수는 있어도 유아부터 대학생까지 완전 통합된 교육기관과 모든 연령을 커버하는 교사가 존재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로 뭉뚱그려서 "나는 선생님이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부캐는 크리에이터, 본캐는 교수"라고 하는게, 교육이라는 거대하고 복잡다단한 실천 앞에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가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아쉬움을 토로해 본다.

 

제목의 절반에 대한 문제는 다 이야기했고, 이제 다음 절반이 남았는데... 나머지에서도 다소 아쉽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디지털 전환 교육담이라고 했으나, 사실 '거꾸로 수업' 혹은 '플립러닝' 이라고 특정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본문 중에 도사리고 있으니 제목의 나머지 절반 정도는 그냥 넘어가야겠다.

 

 

2.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교육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작가는 분필과 칠판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교육 방식은 이제 그 유통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디지털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함을 구체적인 사례와 구글을 기반으로 한 도구들과 소개하며 역설하고 있다.

 

물론 변화는 필요하다. 아니, 변화해야만 한다.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유통기한'이라는 말이다. 유효기간이 다 된 것은 정말로 "칠판과 분필로 대표되는 교육 방식"일까? 그래서 새로운 도구인 "디지털 도구를 활용한 교육 방식"으로 모습을 바꾸면, 즉 선생님들이 칠판과 분필을 손에서 놓고, 구글에 로그인을 하면 새로운 교육이 구동하게 되는걸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교육은 달성 불가능한 목표이다.

 

새로운 시대가 왔음은 원리적으로 사후적 깨달음의 영역에 있다. 새시대의 접근을 몇 미터 전부터 확실히 감지하거나 자신이 지금 구시대와의 경계선을 넘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시대의 변화가 어느 정도 쌓이고 쌓였을 때 "아... 지금은 다른 시대구나.", "아... 과거의 그 때부터 새로운 시대로 바뀌었구나." 하는 방식으로 뒤늦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기존 교육을 비판하는 출발점은 "우리 교육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일진데, 시대인식의 뒤쳐짐은 숙명이므로 그러한 관점에 비춰 보았을 때 교육도 역시 언제나 뒤쳐져 있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먼저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게 된 다음에야 교육이 새시대에 적합한지 판단할 수 있고, 그 이후에야 변화를 추구하게 될 것으므로 새교육은 새시대에 비해 살짝이 아니라 두단계, 세단계 더 뒤쳐져서 따라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새로운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는 선언은 그래서 말로는 그럴싸해 보일지 모르지만, 교육을 바꾸고 나면 맞추고자 했던 그 시대는 이미 구시대로 전락해버리기 일쑤이므로 현실성이 없는 공염불과 다를 바 없다.

 

 

유통기한이 다 된 것은 "칠판과 분필로 상징되는 교육 방식" 따위가 아니다.

 

유효기간이 다 했거나 종말지점에 도달하는 속도가 빨라진 건 "학교 교육"이 아니라 "선점을 통한 베타적 권리의 독점적 확보"와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천문학적인 부의 획득"이 아닐까? 아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토지와 신분'을 먼저 차지했다는 사실에 의해 독점적으로 부를 유지했고, 가까운 과거까지는 '지식'을 선점하여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독점적으로 부를 끌어냈다면 이제는 '정보'를 선점하여 자기한테만 유리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으로 독점적인 부를 획득해 내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땅이든, 신분이든, 지식이든, 정보든 뭐가 됐든지간에 선점하는 것을 통해서 독점적으로 성공, 위신, 평판, 재화 등을 혼자만 움켜쥐겠다라는 '정신문화'에 갇혀있다면 여전히 같은 시대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시대란 물질보다는 정신의 변화에 의해 달성되는 것일테니 말이다. 도구만 바뀌었을 뿐 행동양식이 똑같은데 과연 그것을 시대의 변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책의 작가는 "사람은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는 다시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마셜 맥루한 박사의 말을 몇 번 인용할 정도로 도구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당연히 도구가 바뀌었으니 시대도 변화했다고 할 수 있지."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도구의 변화보다는 정신의 변화" 아닐까?

 

4차산업혁명을 말하며 기존 교육을 비판하는 자들은 지금의 공교육이 현대자동차 컨베이벨트 노동자를 양성하는 교육이라서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하지만, 구글-애플의 직원을 양성하는 교육 역시 같은 시대정신 속에 있는 건 매한가지가 아닐까? "인간"을 생각하는 교육이 아니라, 결국 취업을 준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회사가 강철을 기반으로 하느냐 실리콘을 기반으로 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교육 방식'이나 '도구의 사용법'을 '선점'하려는 기존의 문화가 아니라 우리는 좀 더 다른 길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폭발적으로 그 수가 증가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독점'과 '차별', '배제' 등의 정신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 지구까지 살리는 정신을 의식해 내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미래에서 현재로 당겨오는 행위가 아닐까? 유통기한 운운하며 "분필을 버리고, 인터넷 세상을 남들보다 빨리 차지하자"고 외치는 것은 또다른 부조리의 시작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식은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여 단순히 수집하는 것으로는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이 책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그리고 그 단어는 줄곧 긍정적인 의미로만 등장한다.

 

무엇일까? 그 단어는 바로 '빨리'이다.

빨리 배우는 요령이 학교에서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할 중요한 역량인데...
어떤 과목이건 어떤 주제건 빨리 배우고 잘 배우는 러킹머신으로 키우려면
(저는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어느 부분부터 공략하는 것이 가장 빨리 배우는 방법일지를 먼저 고민...

 

지식은 객관적 실체로 늘 그곳에 있어서 일단 어떻게든 빨리 소유하게 한 다음 효율적, 경제적으로 활용만 잘하면 끝인 명사적 개념이 아니다. 지식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으로 그 의미가 구성된다. 즉, 지식을 어떻게 만나는가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빨리'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명사로서의 지식관"과 "그 지식관에 의한 학습관"으로는 그토록 바라는 새시대의 새교육으로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극복해야 할 건 비효율이 아니라 바로 명사적 사고에 묶인 지식관과 학습관이다.

 

어딘가에 절대불변의 진리가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한다라고 하는 지식관이 기존 교육문제들의 핵심이었는데, 그 세계관은 그대로 둔채로 '도구'만 바뀐다고 교육이 바뀔리 없다. 

 

작가는 유튜브를 통해 디지털 세상 속의 도구로 전 세계 석학의 강의를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제 자동차의 발명으로 마부가 사라졌듯 교실에서도 교육자가 혹시라도 사라질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티칭이 아닌 코칭으로, 지식 전달자에서 격려하고 응원하는 치어리더로 역할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과연 변화할 준비가 되었는지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그러한 시대진단은 온당한가요?

교육과 인간, 그리고 성장을 너무 단순하게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요? 

 

 

3.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변화의 필요성과 변화의 방향성을 이야기 할 때면 상당히 많은 경우에 무시되거나 논의를 마칠 때까지 언급조차 되지 않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해야 하는가?, '누가'-'언제' 할 것인가? 같은 의제는 많이 등장하지만, 정작 그쯤까지에서 만족하곤 한다. 아주 중요하면서 결정적인 것 하나가 빠졌는데도 말이다. '이상'을 '현실'로 끌어당기려면 반드시 마지막 단계에는 답해야 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교육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길러줘야 하는 능력으로 저자는 에스더 워치스키의 트릭(TRICK) 소개한다. 트릭이란 신뢰, 존중, 독립심, 협력, 친절함의 앞글자를 따서 조합한 단어이다. 또 전미교육협회가 강조하는 4C도 길러야 할 능력이라고 알린다. 창의력, 협력, 커뮤니케이션, 비판적 사고력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학구적 마인드셋과 배우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 학교에서는 '배우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공부하는 요령을 누가 알려주면 좋을텐데 우리 교육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빨리 배우는 요령'이야말로 학교에서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할 중요한 역량인데(빨리 배우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도대체 배움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길래 빨리 배우는게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걸까?) 정작 학교에서는 알려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밖에도 많다. 상상력, 유추력, 직관적인 추측력 등도 중요한데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물음이 바로 위에서 말한 '어떻게'이다.

 

작가가 강조한 학교에서 우리 교육이 가르쳐야 할 핵심역량들을 모두 교육목표로 정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 역량을 실제로 기르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어떤 커리큘럼을 구성할 것인가?

 

학교에는 도덕 교과목이 있다. 도덕 교과에 대한 비판 중에는 과연 정직, 성실 따위의 덕목들이 도덕 교과를 통해 잘 길러질 수 있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다. 정직을 가르치기 위해서 정직해야 한다라고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실제로 그 덕목을 내면화하는데 효과가 있느냐는 것이다. 

 

작가가 강조한 핵심역량도 마찬가지다. 창의성을 길러주기 위해 "지금부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봐라"라고 '직접적'으로 가르치면 창의성이 정말로 길러질까? 의사소통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지금부터 의사소통을 하자."라고 하면 의사소통 능력이 점차 정교해질까? 배우는 방법은 더욱 심각하다. "배우는 방법을 알려줄께"라는 식으로 배우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을까?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학문이다. 모닥불에 요리를 하든, 가스렌지에 요리를 하든, 인덕션에 요리를 하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요리 재료와 레시피이다. 건강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요리 재료를 좋은 레시피로 조리해야 한다. 학문은 재료이다. 창의력, 협력, 커뮤니케이션, 비판적 사고력, 학구적 마인드셋과 배우는 방법, 신뢰, 존중, 독립심, 협력, 친절함 같은 역량을 '요리'라고 했을 때 '학문'이 바로 그것을 만들어내는 '재료'인 것이다.

 

 

학교에서는 수학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적 편견일 뿐, 학교 교육과정에 제시되어 있는 목표만 보아도 지식만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학이라는 학문을 배우는 것을 통해 의사소통능력을 기르고자 하는 것이고, 사회라는 학문을 배우는 것을 통해 독립심과 협력을 기르고자 하는 것이다. 학교의 교육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작가는 학교에선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면 끝이었고 '공부 머리'가 좋은 친구들 정도만 스스로 요령을 터득해서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이지 나머지는 '배우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식의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대체 왜 지식 외에는 모든 걸 다 안 배웠다고 생각할까? 지식을 제외한 것은 왜 각각의 개인이 알아서 터득한 것이라고 생각할까?

 

내가 '소유'한 것은 모두 내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일 뿐 외부의 다른 도움은 없었다라는 왜곡된 기억은 어떻게 갖게 된 걸까?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라는 식의 부채의식은 왜 하나도 찾을 수 없는걸까?

 

 

 

4. 학교 수업도 숙제와 한 세트이다.

 

약 6년 전, 혁신학교의 바람을 타고 여러가지 수업 방법들이 우리 교육에 불어왔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플립 러닝, 즉 '거꾸로 수업'이었다. 어떤 선생님은 더 이상의 혁신은 없을 거라면서 교육의 끝판왕이 등장했다고 거꾸로 교실을 치켜세우기도 했지만, 그렇게 대단하게 등장한 거꾸로 교실은 몇 년이 지난 뒤 프로젝트 학습, 문제기반학습 등에 왕좌의 자리를 내주며 지금은 그 위세가 한풀 꺽이고 말았다.

 

그런데, 6년 전의 그 '거꾸로 수업'을 2021년에 디지털 전환 교육담이라는 책에서 수업 혁신의 주요한 방법 중 하나라는 소개와 함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이 책의 제목이 '플립 러닝'이라고 되어 있었다면 마음의 준비라고 했을텐데... 디지털 전환 교육담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꿈에도 알지 못한채 기습적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는 플립 러닝을 다시 접하면서 다시금 예전에 겪었던 플립러닝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떠올랐다. 플립 러닝은 구조적으로 해결불가능한 결함이 존재한다. 그 문제점이란 바로 학생들이 뒤집힌 시스템(플립 러닝)의 시작점인 '사전영상'을 시청하고 오지 않는다는데 있다. 거꾸로 교실 초기, '사전영상'을 보고 오지 않는 학생들이 소수일 때는 교실 뒷쪽에 노트북 몇 대를 설치해 놓고 숙제(사전영상 보고 오기)를 하지 않은 학생 몇명만 수업에서 분리되어 '사전영상'을 뒤에서 보고 뒤늦게라도 수업에 합류하게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사전영상'을 보고 오지 않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아예 '사전영상'을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수업 시작과 함께 시청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그 순간!!! 뒤집힌 시스템(플립 러닝)은 붕괴되었다.

 

작가도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했다. 영상을 안 보는 학생이 있으면 플립 러닝에서는 수업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반 강제적'으로 영상을 보게 할 방법을 궁리했다고 말이다. 이는 거꾸로 수업은 교실 상황뿐만이 아니라 사전영상의 시청까지가 하나의 전체수업과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 기존 수업도 교실수업 자체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교사 주도로 수업하고, 집에서는 혼자서 숙제를 해야하는 기존 수업방식도 단순히 교실수업만 따로 존재할 수 있는게 아니라 수업이 Home-work(숙제)랑 한 세트인 것이다. 해도되고 안하면 그저 몸으로 때운다는 느낌으로 살짝 혼나면 그만인 성질의 것이 아니다. 숙제를 하지 않으면 수업이 완성되지 않는다. 학교에서의 수업이 끝난다고 해서 배움에 마침표가 찍어지는게 아니라 집에서 혼자하는 숙제를 통해 배움이 쌓이는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배움의 마침표는 선생님이나 친구가 대신 찍어줄 수 있는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배운 것을 돌아보고 무엇을 배웠는지 구성하는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지기에 혼자만의 시간은 필수로 취급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교육이 대학 입시에 매몰되고, 그로 인해 사교육의 위용이 공교육을 뛰어넘으면서 '학교숙제'는 그 권위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학교의 수업은 단위 차시로 분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이다. 최소 몇 차시... 혹은 몇 주... 길게는 한 달의 호흡으로 운영된다. 학교숙제가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취급되면서 학교수업은 뜬구름처럼 둥둥 떠나닐 뿐 단위 수업들이 사슬처럼 연결되어 학생들의 배움으로 자리잡지 못하게 되었다. 만약 다시 '학교 숙제'라는 것의 위치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플립 러닝이 아니라 스탠다드 러닝으로도, 아니 오히려 스탠다드 러닝이야말로 교육 혁신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해 본다.

 

 

마지막으로... 근본적인 의문인데...

'도구'의 전환일뿐인 구글 플랫폼의 확장과 그걸 사용하는 것에는 "이노베이션"이라는 어머어마한 이름을 붙여주면서 근본 체질부터 변화해야 하는 교육의 변화에는 왜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다소 소극적인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걸까?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교육을 너무 도구적으로만 소비하는게 아닐까?

 

 

이 책의 작가는 코로나19로 인해 굳이 학교에 오지 않아도 많은 부분을 온라인 수업이나 독립적인 영상 시청을 통해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와는 정반대의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싶다.

 

교육은 역시 '비대면'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교육은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은 목적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이제 회사의 부품(직업교육)을 생산해 내기 위한 교육이 아닌 어엿한 사람(인간교육)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으로 우리 사회의 교육관이 변화하기를 기도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