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업이라는 책이 새롭게 세상에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스로) 좋은 수업이라니....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뭔가 기분이 언짢아졌다고 해야겠다.
교육은 그 특성상 운명적으로 "교육하는 자"를 겸손하게 만든다. 교육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아마 교육하는 자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초임교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켜봐온 교직 선배들이 모두 비슷한 자세를 유지하며 교사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 수업이 어렵다."
"나도 매일 실수한다."
"나는 여전히 잘 모른다."
같은 말이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이른바 선배라는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다고 "능력부족", "함량미달"은 단연코 아니었다. 단지 "겸손"의 자세일 뿐 교직 선배들의 능력은 눈부셨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겸손"은 자신감 부족, 내심은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 연기하는 위선과 그 결이 비슷해졌다. 그래서인지 교육계에서도 겸손의 자세가 희미해져만 간다. 특히 교육도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겸손이 사라진 빈자리를 자화자찬으로 자신과 자기 수업의 좋은 점을 일단 "홍보"하고 보는 교육자들이 속속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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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자면 나는 "좋은 수업을 알려주겠다는 책"을 보고 기분이 살짝 불편해졌다. 물론 이런 나의 감정에는 근거없는 나의 "오만"이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잠깐 급히 나를 변호하자면 "감히 좋은 수업을 들먹이다니..."라는 식의 "오만"은 결코 아니다. 내게는 그런 건방진 오만을 가질만큼의 합당한 뭣도 없기 때문에 10년차의 객기로 치부될만한 시건방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교육의 장에서 겸손하지 못하고 자만했을 때 필연적으로 마음 속에 찾아오게 되는 "명예심"과 "이기주의"가 교육 생태계를 얼마나 오염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주제넘는 "걱정"과 관계된 "오지랖" 정도를 바로 지금, 내가 부리고 있는 것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좋은 수업"을 알려준다는 제안에 기뻐하며 그곳에 푹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명예심과 이기주의는 우리가 극복해야만 할 이데올로기이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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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업]은 제목 그대로 얼마든지 다채로울 수 있는 좋은 수업을 알려주며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좋은 수업"이란 무엇일까?
[좋은 수업]은 명확하게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목표"를 중심에 둔 수업이다. 즉, 좋은 수업이란 학생이 목표에 잘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수업이라는 것이다. 목표란 바로 교육과정의 성취 기준이고 말이다. 좋은 수업은 국가가 그 질을 일정수준 이상으로 관리하는 교육과정의 성취 기준이라는 목표에 학생들이 안정적으로 도달할 수 있게 노력하는 수업이라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제시하는 명확한 기준이다.
하지만, 교육과정의 "목표"에 잘 도달하게 하는 수업이라는 기준 자체의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그 교육과정이 "누구"의 "무엇"을 위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교육과정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들여다 보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그것에 도달하게만 하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교육은 곧 변화이다. 변화를 추구한다. 즉, 교육의 행위를 통해 학생을 변화시키는 사태이다. 변화를 성장이라고 불러도 좋고, 발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지금 우리 교사들은 교육과정의 목표가 학생들에게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연구 결과를 공유하고 있을까? 운 좋게도 현재의 교육과정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게 설계되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반대라면 끔찍한 일 아닌가? 그 반대는 무조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책이 말하듯 교육과정과 교과서는 소위 "교육 전문가"가 만든 것이니 그 점은 일단 믿고 넘기면 그만일까?
<오늘의 교육 52호> 에서 장승규 선생님께서는
" 수업을 성공하고 싶다면 교육이라는 행위가 무엇이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무언지 교사 스스로 살펴보아야 해요. 그런데 교사들은 지금 무엇만 살펴볼까요? 수업이나 교육과정만 봐요. 교재연구는 하는데 아동연구는 안 해요. 아무리 재구성을 잘한 수업을 해도 그 안에 아이들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교육이 될 수가 없어요."
라고 말씀하신다. 장승규 선생님의 말씀이 깊이 가슴에 와 닿는다.
교육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다. 교육과정만 들여다봐서는 교육을 마주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목표"에 잘 도달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 수업을 과연 "좋다"고 해도 될까?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아이들은 어떻게 발달해 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연구의 흔적이 담기지 않은채 그저 교육과정 목표만 이야기한다면 그런 수업은 진정 누구의 무엇을 위한 수업이란 말인가? 아이들이 설 자리는 있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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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업]의 제 3장은 좋은 수업을 위한 수업 방법에 관한 것이다. 좋은 내용이 대부분이긴 한데 한가지 눈에 띄는 소위 "꿀팁"이 등장하기에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책에서는 새로운 수업 방법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수업 방법을 부분 부분으로 자른 뒤 그 중에서 필요한 것만 부분별로 가져와서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수업 방법을 부분으로 조각내면 새로운 수업 방법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부담갖지 말고 여러 수업 방법의 장점만을 골라 내 마음대로 조합하여 수업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꿀팁"으로 제시하고 있는 그 밑바탕에 흐르는 정서가 느껴저서 숨이 막혀 온다. 생명의 온기가 증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체는 전체인 것으로 인해 특별함이 생긴다. 그리고 바로 그 특별함 때문에 가치가 부여되어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힘을 준다. 전체를 부분으로 해체해 버리면 그 특별함이 사라진 그저 파편일 뿐 우리에게 아무런 에너지도 전하지 못한다. 분석의 행위가 "전체"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함이라면 상관없지만, 전체의 특별함을 품어보기 위해서라면 섣불리 조각내어 판단하는 일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좋은 수업]의 꿀팁은 새로운 수업 방법이 있을 때 부분으로 조각내라고 조언한다. 나의 편의를 위해 여러 수업의 파편을 짜깁기 하라는 정도로만 말했다면 그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경도되었구나 하며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새로운 수업 방법을 부분으로 조각내면 특별함이 사라질테니 그 이후에 부담없이 장점들만 쏙쏙 가져오면 된다고 말하는 건 쉽게 넘길 수 없는 문제이다.
아니... 애초에 "새로운 수업 방법"을 왜 가져오고자 했나? 그 특별함 때문에 가져오고자 하는 마음이 든 것 아닌가? 그런데 그 특별함을 해체해 버리면 새로운 수업 방법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남아있냐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정서는 이 책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다른 학교급은 모르겠고, 우선은 초등교사 전반에 자리잡은 정서이다. 나도 그리 자유롭지 못하고 말이다. 이 정서에서 벗어나 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는데, 일단 몸이 편하니...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특별함을 느껴보기 위해서는 온전히 그 특별함을 받아들여 보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그 속에 숨어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 추구하는 가치, 핵심과 본질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수업 방법에 녹여내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결코 처음부터 조각 조각 나누어 마음에 드는 것만 취하려 해서는 안된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 초등 공교육의 교사공동체에서 일단 먼저 그 흐름을 바꾸어할 것이 바로 이 정서이다. 모든 것을 조각내어 내가 함부로 짜깁기 해도 된다는 바로 이 "태도" 말이다.
......
나는 [좋은 수업]을 말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는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번재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두번째는 특별함은 전체의 조화속에서만 살아 숨쉴수 있다는 정서.
일단 이 두가지를 가운데 놓고 나서야 목표, 내용, 방법, 평가를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