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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X3]서( S)평 쓰(S)는 선(S)생님

[SX3]교육이 없는 나라-서열화된 대학, 경쟁력 없는 교육, 불행한 사회 : 그러고보니 여전히 교육이 살아나기는 조금 이른 것 같다.....

by Teachography 2023. 5. 11.

 
"교육이 없는 나라" 라는 제목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참으로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교육이 없다라는 선언에는 필연적으로 "있었어야 하는 교육"이 무엇-무엇인데 그걸 우리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었노라고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육이 무엇이고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가를 아는 것은 교육자에게는 필수적인 소양이다. 교육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정확히는 학교와 교실이)는 내부로부터의 비명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은 요즘(초등교사들의 최대 커뮤니티 ㅇㅇ스쿨의 게시글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한걸 보아하니), 교육자들이 다시금 나아갈 방향을 찾고 넘어진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교육에 대해 말하는 소위 지식인들의 이야기들이 큰 힘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교육이 없는 나라라니... 이런 제목의 텍스트에 반드시 기술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있었어야 할 교육"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있을지 나는 매우 큰 관심과 흥분을 안고 책을 펼쳤다.
 

1. 이무기의 교만

우리나라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다소 뜬금없이 교육에 대한 비평을 하게 될 때 너무도 빈번하게 범하는 오류(?)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그 교육의 수혜자, 결실, 적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아예 없는 사실인 채하면서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곳에는 조그만 이무기가 한마리 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무기가 하늘로 승천하여 용으로 변태한 뒤 마을의 수호신이 되길 바랐다. 마을 사람들은 옥황상제에게 매일 기도를 올리고, 공양을 정성스럽게 했으며 심지어 몇년에 한번씩은 마을의 어린 아이를 옥황상제에게 바치는 인신공양까지 하기에 이른다. 몇 십년이 흐른 후 옥황상제는 마을 사람들의 지극정성에 감동하여 이무기를 용으로 변하게 하고, 승천을 허락한다. 하지만, 이무기는 용이 되어 마을의 수호신이 되길 거부한다. 자신은 이무기였던 적이 없으며 처음부터 용이었기에 인간들과는 다른 고결한 존재이지 않냐면서 팔짱을 끼고 '천궁'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다 보고는 혀만 끌끌찰 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다행히 조금의 머뭇거림이 있긴 하다. 교육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교육 전문가도 아닌 자신이 이런 책을 써도 되는건지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과  KAIST 입학처장으로서 자신이 했던 일들이 오히려 우리나라 교육 문제들을 심화시키진 않았는지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 이 약간의 머뭇거림이 교육에 관한 저자의 이야기에 진정성을 담아내는 측면이 분명히 있긴 하다. 신기한 일이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인걸까?
이 책의 저자는 "이무기의 교만"에서 벗어나 있을까? 그렇지 못하고 역시인 걸까
 
저자는 우리나라는 교육이 없는 곳이라느니,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현재의 교육 제도 하에서는 아이들의 미래를 장담하기 힘들다느니, 대학이나 사회에 나오면 아무짝에 쓸모없는 낡은 지식들을 오로지 입시를 위해 암기하고만 있다느니, 우리 나라의 교육은 아직도 식민지 교육을 벗어나지 못하다느니 하면서 지금 우리 교육 현실에 답답해 한다.
 
이 책의 저자 자신은 어떻게 자신이 지금의 지성을 갖출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열악한 우리나라 교육 환경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뛰어난 능력과 노력으로 탁월하게 이뤄낸 것이라고 여길까? 아니면 유학이라는 힘든 과정을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이겨내어 선진국의 교육을 성공적으로 내면화 할 수 있었기에 높은 지성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여길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은 원래 뛰어난 지성을 갖춘고 태어난 조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정말 어떻게 믿고 있을까?
 
우리나라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자신이 우리나라 교육환경이 잉태하여 낳은 결실들 중 하나라는 걸 좀처럼 인정하려 들질 않는다. 아니 인정하질 않는 걸 너머 자신은 열악한 환경을 온전히 자기 능력으로 뛰어넘은 사람인양 말한다. 마치 이무기가 용이 된 후 자신이 원래부터 용이었지 이무기였던 적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태도의 지식인들이 하는 교육비판은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드높이고, 도덕적 우월감을 높이는데만 유용할 뿐 진정한 문제해결 및 교육혁신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정당하게 자격을 얻었든 아니든간에 사회적 자원을 독점하면서 그들의 현재 사회적 지위와 고도의 지성을 형성하게 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교육에 대한 비판은 우선 마을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존중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그 다음은 마을의 수호신이 되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할 때 진정한 의미가 생긴다. 나도 같은 시스템 안에서 발을 딛고 서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어야만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유념했으면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저자도 말하고 있듯, 다변화되고 전문화된 사회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교육전문가도 아닌 기계공학과 교수의 말을 대중이 왜 이렇게 귀담아 듣는걸까? 본질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청중을 감탄하게 만드는 강의력 때문일까? 그럴....리가 ... 있겠는가?
 
다름 아닌 현재 우리 나라 교육이 서열화와 입시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인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까? 서울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면 플러스,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하면 플러스, 상위권 대학에서 교수를 한다고 하면 플러스. 이러한 플러스 플러스가 합쳐져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지 않는가? 교육 시스템이 서열화 되어 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의 수혜자들은 그래서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할 때는 더욱 섬세해야만 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나저나 이 책의 저자는 나의 염려와 불안감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다행히 그런 것들과는 한참을 빗껴있는 사람일까? 아무래도 후자였으면 하고 기도해 본다.
 

2. 있었어야 할 교육

책에는 사실 교육의 내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하지만 있었어야 할 교육이 제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름 아닌 "인재양성"과 "국가 발전", "국가 경쟁력 제고", "글로벌 경쟁에서의 승리"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있었어야 할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읽다보니 저자가 왜 "교육이 없는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하였다. 사실 "교육이 없는 나라"라는 진단은 매우 이상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교육이 없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육은 우리 몸의 심장과 같은 성질이 있다. 태어난 순간부터 뛰기 시작해서 죽기 전까지 한번도 쉬지 않는 심장처럼 교육은 어느 공동체에서나 그 공동체의 유지, 발전을 위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다. 심장이 병에 걸려 수술을 할 때조차 심장을 멈추게 하지 않은채 고쳐야 하는 것처럼 교육도 교육을 일시중지 시킨채로 문제를 고쳐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게 또한 같다. 교육문제 해결이 난해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움직이는 자동차의 엔진을 멈추지 않은채로 엔진을 수리하는 것처럼 교육은 문제해결에 큰 어려움이 있고 그러기에 관성이 강한게 특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교육 문제를 극적으로 드러내어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갖게 하는 목적이었다고 해도 너무 과도한 말이다.
 
허나 저자가 생각하는 있었어야 할 교육에 대한 생각을 듣자 왜 저자가 교육이 없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교육은 옛날에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교육이었다.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애국심 넘치는 "국민"을 길러내자는 국민교육헌장 시절의 우리나라 교육말이다. 저자가 있었어야 할 교육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언어 표현은 현대적으로 바뀌었어도, "인재"라는 표현에서 스멀스멀 그 잔재가 새어나오는 "인간을 대상화"하는 사고방식이 주류였던 그 시절 교육을 저자는 있었어야 할 교육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재교육이 아니라 인간교육, 키워내고 길러내는 교육이 아니라 성장과 발전하게 도와주는 교육으로 혁신하자는 노력이 최근까지 몇 십년동안 교육계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피어나 퍼져나갔으니 저자에게는 현재 교육은 없고, 당장 눈앞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입시만 보이지 않았겠는가 하는게 내 생각이다.
 
 
또한 저자는 우리 교육, 특히 대학이 더 이상 계층 차별화의 도구가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계층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쉬운 계층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고도 교육이 했어야할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이건 다소 충격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교육이 계층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니... 이 무슨 전근대적인 가치관이란 말인가. 아무리 극우세력이 정치적으로 힘을 얻는 등 "공동선"과 "인권", "평등"의 가치가 무너지고 있는게 전세계적인 추세라고 하더라도 교육이 계층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2023년 대한민국에서 교육혁신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듣게 되다니 적잖히 충격을 받았다. 
 
교육이 계층 사다리가 되어야 하는게 아니라 교육으로 말미암아 계층이라는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을 사라지게 만들어야 하는게 아닐까? 현실적으로 기득권세력이 그걸 가로막고 있어서 실현가능성이 지금은 낮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가치 지향은 그래야 하는게 아닐까? 그런데... 교육이 계층 사다리가 되어주라라니... 어질어질하다.
 

3. 학생과 학부모가 억울해 하면 안되는 것 아닐까?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바로 "잘못된 교육 제도와 그로 인해 비롯된 사회 환경 탓으로 아이들이 억울하고 학부모가 억울하다"고 하는 대목이다. 과연 학생과 학부모는 억울해 해도 되는 존재들인가?
 
신자유주의의 심화에 따른 물질만능주의가 무분별하게 아무곳에나 적용되면 그것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최근 그 영향력이 온갖 영역으로 마구 밀고 들어가면서 인간성이 중요한 분야들을 병들게 만들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교육분야"이다. 
 
신자유주의가 교육에도 적용되면서 학부모와 학생은 "수요자", 학교와 교사는 "공급자"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교육계에서는 "수요자 맞춤 교육", "수요자 중심 교육"을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걸보면 신자유주의가 교육의 영역에도 꽤나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로인한 병폐가 지금 학교 여기저기에서 곪고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자세한 사례는 여기서 언급하진 않겠다.)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의 마련과 학교의 혁신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것은 바로 수요자-공급자라는 물질주의적인 개념자체이다. 교육의 영역에서는 당장 폐기해야할 개념이다. 왜냐하면 교육은 상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이 상품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대하는 행위이다.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게 아니라 인간의 성장을 그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기에 교육을 상품으로 다루면 결국 인간을 물건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물론 "인재"라는 단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사람들한테는 인간도 상품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별로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학생과 학부모는 억울한 존재가 아니다. 억울해 할 수 있는 것은 시장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불량식품을 속여서 팔았을 때처럼 말이다. 이 때는 소비자가 무구한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교육의 장에서 학생과 학부모는 무구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도 교육의 장을 함께 구성하고 만들어가는 참여자이다. 억울해하면서 컴플레인 걸고 보상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학교에 힘을 보태고 교사가 내미는 손을 잡은채 앞으로 기꺼이 걸어가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억울하시지 않느냐며 위로해 줄게 아니라 함께 가자면서 용기와 힘을 북돋아야 하는게 아닐까?
 

4.순진함과 교만함, 비겁함과 교활함

마지막으로 우리 교육이 입시에만 매몰되어 있어서 나타난 대표적인 사회문제로 2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이게 참 오묘하다.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첫번째 사건은 얼마전 있었던 모 고등학교 교무부장과 그 쌍둥이 자녀에 의한 시험문제 유출사건을 언급하였다. 이 사건은 분명 명백한 범죄인데.... 이 사건과 두 번째 사건으로 조국교수 사태를 연결시켜서 우리 사회의 대학 입시와 관련된 도덕적 해이를 논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두가지 사건을 병치시키는게 지식인의 양심에 맞는 행위인지 의문이 생긴다.
 
정치적 견해 차이에 따라 사건의 실체는 다르게 판단할 수는 있지만(사실의 해석을 다르게 해 버리게 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은 조국교수 사태는 "정치적 사건"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사건에서 정치를 제거하고 언급하는 행위를 어떻게 봐야할까? 정치는 주관적인 영역이니까 정치를 제거하면 객관적인 것이 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사건은 정치적인 것을 온전히 포함한 것까지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이지 않을까?
 
초전도 현상에서 자석이 공중에 뜨는 모습을 과학을 제거한 채 말하는 걸 상상해 본다. 어쩔 수 없이 초자연적인 해석이나 오컬트적인 해석밖에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한 설명은 하면 할 수록 허무한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정치적인 사건에서 정치를 제거해 버리는 것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객관적인 척해도... 중립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허무해 지는 것 같다.
 
만약 정치적 사건에서 정치를 제거하고 교묘하게 명백한 범죄랑 연결하는 행위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면 순진하거나 교만한 것이고, 문제가 될 걸 알았지만 일부러 그랬다면 비겁하거나 교활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보통은 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었다. 저자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본 것이다. 그랬더니....
 
"윤석열 정부에서 과학기술부 장관 후보자로 선정"
이라는 기사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역시... 가장 정치적이지 않아 보이는게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명제는 이번에도 딱 들어맞는다. 차라리 정치를 제거하지 않고, 정치도 교육문제와 함께 이야기 했더라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진 않았을텐데... 뒤늦게 정치적이라는 인상을 받아서인지... 요소요소마다 행간의 의미에 대해 여러가지 상상을 하게 만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