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를 읽는 순간이라는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었다. 우리의 삶이 변화해 가는 것에 맞게 그에 적합한 책이 딱딱 맞춰서 출판되는 것을 볼 때면 작가의 지성과 출판계의 시대를 읽는 능력에 매번 놀라게 된다. 이러한 책이 번역되어 지금 시점에 출판된 것을 보면 현 시대의 문제점이 이 책을 불러냈으리라...
"의미로부터의 해방" 속 의미는 저자가 말하고 있듯 정보라고도 바꿀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정보의 끝판왕이라는 AI가 "사상"으로 마구 침윤해 들어오는 중이다. 스마트폰 앱이 급속도로 번져 나갈 때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며 "코딩 교육"을 부르짖더니 이제는 그 부르짖음은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진 학교창고 속에 처박혀버렸고...새로운 외침이 학교의 귀를 멀게 하고 있다. AI를 활용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며 아이들에게 정보라는 자극을 무한대로 늘려서 밀어넣으려 하는 것이다.
무제한의 정보라는 자극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야만 한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 오직 "지적인 자극"만 강제하는 교육은 일종의 "학대"와 다르지 않다.
따위의 반성적 외침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무시되고 비난받는 일이 되었다. 심지어 적폐, 병폐라는 소리까지 듣는 지경이다.
무의미의 무의미함을 견디는 것은 독립연구가 박동섭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괄호로 묶어두고 일단 지나치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당장 의미를 도출해 내려고 성급하게 나의 도량형으로 대상을 제단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의미불명인 것을 의미불명인 상태로 놓아둔채로 충분한 자유를 맞보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자유는 허무나 방치가 아니다. 그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까지 끈덕지게 마주하는 것이다. 때론 고통스러울 수도 있을지라도 말이다.
예전과 지금을 곧바로 비교하기에는 주변 상황이 너무나 다르게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를 하는 것이 어불성설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 교육과 지금 교육을 비교해 보면... 지금의 교육은 당장 의미 있다고 평가될 수 있는 것들만 가치 있다고 여겨지며 행해진다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교육을 평가할 때 "교과서"는 늘 무의미한 존재였다. 죽은 지식이나 가르치는 학교라는 명제의 절대적 근거로 늘 교과서가 지목되었다.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 그럴 것이 분명하다. 교과서만 가르치는 것은 시대착오적 행태,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연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게으름, 나태함 등의 상징이었다.
한동안 학교는 "교과서"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교과서를 벗어나 이것저것 뭔가를 했다. 교육이란 그 성과가 당장 나오지 않으며, 성과가 생겨도 어떤 것이 직접적인 원인인지 판별할 수 없다는 특성 덕분에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업들이 이곳저곳에서 출현하게 되었다.무의미를 읽는 순간이라는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었다. 우리의 삶이 변화해 가는 것에 맞게 그에 적합한 책이 딱딱 맞춰서 출판되는 것을 볼 때면 작가의 지성과 출판계의 시대를 읽는 능력에 매번 놀라게 된다. 이러한 책이 번역되어 지금 시점에 출판된 것을 보면 현 시대의 문제점이 이 책을 불러냈으리라...
"의미로부터의 해방" 속 의미는 저자가 말하고 있듯 정보라고도 바꿀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정보의 끝판왕이라는 AI가 "사상"으로 마구 침윤해 들어오는 중이다. 시작은... 인터넷이지 싶다. 비교적 안전하게 정보라는 자극에서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었던 학교라는 보호막이 뚫리기 시작했던 때가 말이다. 인터넷이 등장하자 정보화 교육이라며 교실에 컴퓨터와 TV를 밀어넣었다. 교사의 음성과 피아노의 연주음, 종이 위의 색채는 지루하고 낡은 것으로 격하되고 커다란 TV화면 속 동영상과 그 안에서 나오는 기계음, 그리고 형형색색의 사진들이 선진교육이라며 교실을 장악해 버렸다. 스마트폰 앱이 급속도로 우리 삶을 잠식하게 되자 이번에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며 "코딩 교육"을 부르짖었지만, 그 부르짖음은 곧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진 학교창고 속에 처박혀버렸다. 기술의 발전속도가 너무 빨랐던 탓에 코딩교육이라는 외침이 곧바로 다른 외침으로 덮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새롭고 강력한 그 외침으로인해 AI를 활용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며 아이들에게 정보라는 자극을 무한대로 늘려서 밀어넣으려고 하는 물결이 학교로 밀려 들어오는 걸 목도했으니... 오히려 문제가 심각한게 아닐까 싶다. 더불어 교육주체가 그 물결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물결이 밀려 들어온다는 것이 또한 심각한 일이다. 앞으로 또 어떤 물결이 밀려들어와서 기존의 교육을 밀어낼 지 모르니까 말이다. 잠깐... 교육 주체들이 무능하니까 외부에서 물결을 만들어 넣어주는 거라고 할까봐 한가지만 첨언하고자 한다. 교육주체들은 언제나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빚어내고 있었다. 물가는 살피지도 않은 채 자기들 만족으로 만들어져 밀려들어오는 외부에서의 물결이 그걸 파괴하고, 또 파괴하더라도 말이다.
다시 돌아와서...
TV는 전원을 끄면 자극을 차단할 수 있었고, 인터넷은 장비와 속도의 제한을 받았기에 자극이 오는데 시간차가 있었다. 교육의 현장에서 뭔가 해볼 틈이 존재했던 것이다. 코딩은 너무 빨리 그 열기가 식었기에 별 자극을 주지 못해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하지만 스마트기기가 결합된 AI활용 교육은 무제한적인 자극을 거의 실시간으로 아이들에게 밀어넣으려고 한다. 심지어 어떤 문제가 있을지를 사전에 고려하지도 않는다. 교육의 현장에서 무한대의 자극으로부터 아이들은보호할 수 있는 뭔가를 찾을 수 있을까? 혹시 문제가 생긴다고 하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있을까?
과연 어찌될 것인가...
무제한의 정보라는 자극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야만 한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 오직 "지적인 자극"만 강제하는 교육은 일종의 "학대"와 다르지 않다.
따위의 반성적 외침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무시되고 비난받는 일이 되었다. 심지어 적폐, 병폐라는 소리까지 듣는 지경이다.
무의미의 무의미함을 견디는 것은 독립연구가 박동섭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괄호로 묶어두고 일단 지나치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당장 의미를 도출해 내려고 성급하게 나의 도량형으로 대상을 제단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의미불명인 것을 의미불명인 상태로 놓아둔채로 충분한 자유를 맞보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자유는 허무나 방치가 아니다. 그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까지 끈덕지게 마주하는 것이다. 때론 고통스러울 수도 있을지라도 말이다.
예전과 지금을 곧바로 비교하기에는 여러 상황과 여건이 너무나 다르게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를 하는 것이 어불성설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 교육과 지금 교육을 비교해 보면... 지금의 교육은 당장 의미 있다고 평가될 수 있는 것들만 가치 있다고 여겨지며 행해진다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교육을 평가할 때 "교과서"는 늘 무의미한 존재였다. 죽은 지식이나 가르치는 학교라는 명제의 절대적 근거로 늘 교과서가 지목되었다.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 그럴 것이 분명하다. 교과서만 가르치는 것은 시대착오적 행태,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연구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게으름, 나태함 등의 상징이었다.
한동안 학교는 "교과서"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교과서를 벗어나 이것저것 뭔가를 했다. 교육이란 그 성과가 당장 나오지 않으며, 성과가 생겨도 어떤 것이 직접적인 원인인지 판별할 수 없다는 특성 덕분에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업들이 이곳저곳에서 출현하게 되었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일견 아무 의미나 도움이 안 되는 활동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단초가 마련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최근... "절대 옆길로 새지 말고, 교과서만 그대로 가르쳐라."라는 말을 학부모와 교감에게 듣게 되는 일을 경험했다. 그들은 당장의 지필평가에서 고득점을 맞을 수 있는 교과서 수업이 중요하다고 했다. 시험이 교과서에서 나오니 교과서를 그대로 다루는 수업이 좋다는게 학부모의 요구였고, 교과서를 그대로 하는 것이 나중에 무언가의 문제에서 면피하기 좋다는게 교감의 지시사항이었다.
성장, 교육, 의미있는 변화, 미래를 위한 교육 따위는 그곳에 없었다. 즉각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이 절대선이라는 악마적 논리만 있을 뿐. 책에서는 의미는 추구하는 삶에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금전에 대한 욕망이 빈곤에 대한 공포를 가르치고, 소유에 대한 욕구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낳고, 안정에 대한 동경은 파멸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며 의미를 찾는 심리가 초조함을 부른다고 말하고 있다. 의미에 대한 집착으로 의미를 얻게 된 후에도 그것이 망가질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를 겁내게 만들어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슈타이너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매몰된 물질주의의 궁극적 목적도 물질적 풍요를 통한 자유가 아닐까? 그런데... 물질주의를 통해서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진정 자유로 향하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을 해야하는지 사고해 봐야하는 때에 서 있다. AI의 발전속도나 그 수준을 보았을 때 상당히 위험한 끄트머리까지 와 있는 것 같다.
다시 머리를 맞대고 뒤를 돌아봐야할 때이다. 밀려오는 거친 파도를 견디고 그 너머를 바라봐야 할 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