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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X2]선(S)생님의 시(S)선

[SX2]지금 학교의 모습은...1편:아이들이 방과후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는 최소한 알고 "교육개혁"을 말하자.

by Teachography 2021. 9. 15.

10년 전부터, 아니 조금 과장을 보태면 무려 20년 전부터 우리 나라의 교육 현실을 개탄하며 쏟아지는 수많은 비난의 말들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 나(비난의 말을 하는 어른)의 어린 시절에는 들판으로, 개울로, 또는 운동장으로 모여든 아이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놀기 바빴다. 공부 따위는 하나도 하지 않고 어린 시절을 즐겁게 지냈지만, 지금과 같은 성공(고소득 직업, 높은 지위)을 이루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어린 시절 즐겁게 뛰어 놀았던 경험이야말로 나(비난의 말을 하는 어른)의 성공의 밑걸음이 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일제식 수업만을 위해 디자인 된 교실에 앉아 죽은 지식만을 주입받고 있으며, 어떻게든 학교교육을 견뎌 내더라도 놀 시간 하나 없이 학원 뺑뺑이를 도느라 신체는 약해지고 암기에만 치중된 공부 때문에 창의력, 사고력, 적응력, 사회성이 말살되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교육이 이야깃거리로 등장할 때마다 잊지 않고 나오는 종류의 비판이라, 그 때 그 때 구체적인 워딩은 다르더라도 어딘가에서 비슷한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고 심지어 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한번쯤 말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 문제의식에 대응하여 다양한 해법들이 논의되고 적용되어 왔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비판, 대책, 현실, 교육주체들의 각기 다른 욕망 등이 서로 사맛디 아니하면서 개선되는 모습따위 찾아볼 수 없었고, 결국 비난의 화살은 학교로 흘러 모여 들기만 했다. 변화에 저항하는 학교와 교사가 진짜 문제의 원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행히 몇몇 지식인들이 대학 서열화와 직종간 임금 격차의 심화가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말해주면서 학교에 대한 비난을 조금 희석시키기도 하였으나, 어차피 둘다 "진짜 범인 찾기" 담론일뿐 실질적인 문제해결에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학교야말로 반교육 기관"이라는 사회적 오명을 씻기 위해 공교육 현장에서는 최근 '행복'과 '놀이'를 강조하며 교육과정 재구성과 공간 혁신을 하는 등 변화를 모색중이다. 그 밑바닥에 흐르는 생각들은 모두에 소개한 "비난의 말"들과 맥을 같이 한다. 아이들을 즐겁게 놀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고력만을 위한 교육을 해서는 사고력조차 제대로 기를 수 없다는 선언과 함께 약 10년 정도 전부터 교육계는 이른바 "행복한 삶"만을 목표로 추구하며 나아가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인간은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구체적인 답을 우리 사회에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함정이지만...)


아니 솔직히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의 소위 지식인들이 체육 수업을 늘렸더니 학업 성취도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는 식의 미국 어느 고등학생 대상 연구같은 증거들을 들이밀면서, 아이들은 마음껏 놀수 있어야 되는데 우리 교육이 그걸 막고 있다는 논리로 학교를 꾸짓으니 학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더불어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한 모범생은 시키는 것만 잘 할 뿐 누가 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저 점수만 잘 받아내는 기계같은 존재라서, 오히려 학창시절에 문제아로 분류되었던 학생들이 실제 어른이 되면 놀라운 창의성과 학창시절부터 갈고닦은 넉살 등으로 사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큰 돈과 함께 떵떵 거리며 살게 된다는 신화같은 속설이 무기가 되어 교사들은 꼰대일 뿐이라고 조롱을 섞어 공격하니 선생님들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대학입학자격시험에 목줄이 걸려 운신의 폭이 좁은 중등교육과는 달리 초등교육은 상대적으로 발빠르게 "행복"과 "놀이"로 태세를 전환하였고, 교육과정에 즐거움 다섯 스푼, 자기주도성 한 스푼, 문제해결력 두 스푼, 나다움 발견하기 열 스푼 정도를 첨가했다. 학교 내부적으로는 나름 성과도 있었다고 자평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일부 학부모들의 자식교육 철학에도 영향을 주어서 학교수업-학원수업-학습지 숙제로 이어지는 바쁜 하루스케줄에 아이들을 밀어넣지 않고 최대한 아이가 고학년이 될 때까지 버티며 "아이들은 즐겁게 놀아야 한다."에 동참하는 분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지식만을 강조하고, 경쟁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 맞써서 아이들에게 온전한 "놀이 시간"을 안겨주려는 것이다.

사회도, 학교도, 일부 학부모도 "아이들의 놀이"를 강조하고 있는 요즘...
그래서 과연 어떻게 되고 있을까?

아이들의 삶을 나아졌을까?
모두의 바람대로 아이들은 "놀고 있을까?"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친구들과 놀이하며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까?



먼저, 방과후 학교의 풍경을 몇 장 소개한다. 여전히 학원 뺑뺑이를 위해 황급히 학교 앞에 주차되어 있는 학원차로 뛰어가는 아이들이 더 많기에 대다수는 방과후가 되면 학교를 빠져나가고 없지만, 아래 사진들은 "요즘 분위기"에 맞는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틈틈히 찍어둔 것이다.

 

 


"요즘 분위기"에 의해 여유 시간을 확보한 아이들은 방과후가 되면 위에 있는 사진과 같이 WIFI가 잡히는 공간으로 모여든다. 모여서 하는 것의 중심에는 '스마트폰'이 있다. 스마트폰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다. 스마트폰 1대만 있으면 그곳으로 아이들은 모여든다. 스마트폰이 여러대 있으면 여러개를 활용하여, 스마트폰이 1대밖에 없으면 1대만을 이용하여 논다. 스마트폰으로 하는 활동은 게임하기, 틱톡하기, 유튜브보기, 카톡하기 등이다.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은 저학년 아이들의 경우 책상이나 벤치에 모여서 스마트폰을 하지 않고 꼭 바닥에 '널부러져서' 스마트폰을 한다는 점이다. 널부러져 있다는 말이 심한 표현이 아니다. 복도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는 저학년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고학년 아이들의 경우 요즘에는 왠만하면 각자 스마트폰이 하나씩 다 있기 때문에 널부러지기까지는 아이지만, 축 늘어져서 스마트폰 화면을 멍하니 들여다 보고 있는 건 비슷하다.


그래서 '지금 학교'는 운동장에 잡초가 자라고 있다. 학교 관리 업무 중 하나로 어느 순간부터 "운동장 잡초 제거"가 주요한 과제로 추가 되었다.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운동장을 뒤덮어 버리는 잡초 때문에 학교 운동장에는 잡초를 태워버리기 위한 "화염방사기"부터 잡초를 말려죽이기 위한 "왕소금"까지 온갖 방법들이 총동원되고 있다. 예전에도 잡초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 예전에는 운동장 가장자리 정도에만 자랐던 잡초가 이제는 운동장 중심부까지 진출하여 전체를 덮은 것이다. 잡초를 제거하려고 고군분투하시는 분은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지 않게 되자 잡초가 운동장을 점령했다고 말씀하셨다. 쉴새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이 밟아대는 통에 감히 운동장 중심부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던 '잡초'가 운동장 주인 행새를 하고 있다.


자, 일단 이게 현실이다.
"아이들은 즐겁게 놀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분들은 이런 현실을 알고 있을까?

스마트폰을 하면서 아이들은 최고로 "행복"해 한다. 아이들에게 바라는 학교를 상상해 보라고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학교의 모습은 다름아닌 게임을 가르쳐주는 학교, 스마트폰만 하는 학교이다.

아이들이 놀면서 행복해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니 우리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적 현상이라고 좋아할까?


물론, 아이들이 특별히 몹쓸 짓을 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 남녀노소에서 '소'에 해당하는 아이들만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고 여가 시간을 통째로 바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 매몰되어 버린 건 우리나라만의 모습이 아닌 전세계적인 모습이라고 봐야만 한다. 남녀노소-전지구촌이 스마트폰이 제공해 주는 '가상세계'에 빠져있는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TV는 바보상자였다. TV는 재미있긴 하지만, 백해무익한 것이었다. 하지만 10년-20년이 흐르면서 TV는 활용만 잘하면 유용한 매체라면서 사회적 평가가 후해졌다. 게임도 그렇다. 나의 어릴 적 게임은 어른들이 보기에 한심한 놀잇감이자 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프로게이머라는 직업과 프로그래머, 게임제작자 등에 의해 컴퓨터와 스마트폰 게임으로도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교육용 게임으로 즐겁게 공부하면서 효과도 볼 수 있다는 광고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면서 아무도 게임의 존재자체는 더이상 한심하게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가상세계'도 마찬가지다. 아니 벌써 그리 되고 있는 중이다. 유튜브같은 개인방송으로 떼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아예 유아 때부터 내 아이는 '유튜버'로 키우겠다고 말하는 부모도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시간이 몇 년만 더 지나면 지금 내가 '뭔가 바람직한 하지 않는 것이라는 태도'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방과후에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사진을 올린 행위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교사의 전형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사회 지식인들이 "아이들은 마음껏 놀아야 한다."라면서 학교를 비판하는 말을 할 때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이들이 모여 앉아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뭔가 자신들의 어린 시절처럼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 노는 것을 상상하며 학교와 우리교육을 비판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요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같다.

아이들에게 스마트폰 사용을 못하게 하자.
지식교육만 시키고 있다며 학교 교육을 무조건 비난하면서 아이들을 놀게하자라고 다짜고자 주장들 하는 것이 잘못이다.

라는 식의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뭘 좀 제대로 알고 비판을 하든 비난을 하든 하자는 것이다.

우리 교육이 고루하여 잘 변하지 않으려 하고, 옛 경험에만 매달린 채 시대에 한참 뒤떨어져 버렸다면 그러한 지체는 바로 학교와 교사보다는 우리 사회가 학교와 교육을 바라보는 바로 그 시선이 더 심각하다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교육비판'들이 어찌 이리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당당하게 쏟아질 수 있는걸까?

그건 바로 교육에 대한 논의에 '교사'들이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기 때문이라는게 내 결론이다. 교육 문제는 모두 '교사'들이 야기한 문제이기에 교사들만 "문제 해결의 장"에서 배제하면 금방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회 구성원들의 '오만'한 태도가 만연하면서 교사는 늘 교육 문제의 해결에서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지금 교육 현실을 가장 잘 전해줄 수 있으면서도 실제 문제 해결의 선봉에 서야할 교사들이 "문제 해결의 장"에는 없으니 우리 사회의 학교와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은 점점 괴상해지는 것 아닐까?


교사들이 전부 알아서 하겠다는게 아니라, 교육문제를 논할 때는 반드시 교사들 좀 참여시켰으면 좋겠다는 소심한 바람이다.

교육 현실의 모습과 현장의 모습을 듣겠다면서 엉뚱한 사람들 좀 전문가로 그만 초대하고 말이다. 지금까지는 학교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실에 전혀 관심도 없는 교수들의 의견이나 '현장' 전문가라면서 유명 사교육 강사의 의견이 최고의 전문적 의견이라고 다루어지는 것의 전부였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지만 부족하다. 실제 학교에서는 1년만 아이들과 만나지 않아도 '감'이 떨어진다고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이미 십 몇년 전부터 아이들 앞에 서지 않게 된 교사 출신 관리자 직급이나 교육청 관료들도 이제는 좀 '교사'들에게 양보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렇게 지금 현장의 모습을 실감나게 말해주는 교사들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많아진다면 이미 진행되고 있는 학교의 노력들은 무시한채 장삼이사까지 전부 한마디씩 보태며 우리 교육이 진정 가야할 길이라 제목 붙인 해법들을 학교로 마구 밀어넣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 프로젝트 교육과 코딩 교육,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한 온라인-오프라인 블랜디드 교육,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환경교육과 생태교육, 민주시민 육성을 위한 정치교육과 경제교육, 건강한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노조-노동법 교육 등등. 숟가락에 있을 때나 고결하고 훌륭한 가치일 수 있는 것이지 계량없이 한데 마구 섞어 버리면 그저 쓰레기가 될 뿐이라는 건 안중에도 없이 사방군데에서 학교에다가 온갖 좋은 것들을 쏟아붓기만 하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은 학부모와 아이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일까? 지금까지 내가 관찰한 봐로는 '스마트폰'은 리모컨과 같다. 더 이상 자기 아이를 '관리'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때는 끝날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움직였다면 이제는 그러기 싫고 그럴수 없다는 선언과 같다. 스마트폰을 쥐어주고, 자기 시간은 최소한으로 할애해서 그저 통화로 이거 해라-저기 가라 지시만 하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는 자립심을 키워주는 것과 방임 사이에서 '초등학교 입학 하자마자 스마트폰을 턱 안겨주는 것'은 방임에 좀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나는 아이들을 보호하는 어른들이 돈이 아니라 '부모의 시간'으로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으면 좋겠다. 물질이 아니라 영혼으로 아이들을 안아줬으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