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뜬금없이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인생이란
둘도 없는 특별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점점 평범한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의 연속이며
결국, 자연이라는 전체에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일부분들 중 하나로 되돌아 가는게 아닐까?

청소년기나 좀 길게 봐서 청년기까지는 자신이 정말 특별한 존재이고 남들과는 다들 존재일 수 밖에 없으며, 좀 더 나아가 꼭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나온 지나온 그 시절과, 주변을 살펴보면 다들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듯하다. 또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유아일 때는 더욱이 스스로를 엄청나게 특별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요즘 유행하는 이데올로기인 '당신은 특별한 존재', '당신다움을 찾는 것이 인생의 진짜 행복' 따위의 말들은 인간을 '유아의 상태'로 머물게 하려는 수작이 아닐까 싶다. "자아실현"이나 "진짜 내가 원하는 것", "나를 흥분시키는 것"처럼 꿀맛이 나는 말들과 늘 세트를 이루는 다음 단계가 언제나 '나다움'을 곧바로 각종 '소비행위'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그 의도를 짐작캐하기에 충분하면서 일종의 강한 의심까지도 품게 된다.
다음으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인간 존재나 자기 자신을 뭐하나 특별할 것 없는 전체 중 작은 부분일 뿐이라고 인식한다는 것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일이다. 요즘 60살은 노인도 아니긴 하지만, 어쨋든 TV에 우리 시대의 어른들이라며 꽤나 성공했거나 여러 업적을 쌓았다는 육십 몇세쯤되는 어른들이 나와서 들려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한결같이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닌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인간이라는 사실과,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기에 개의치 않는다'는 고백이 주를 이룬다. '그냥 우연히 이 세상에 와서 내 멋대로 살다가 때가되면 누구나처럼 똑같이 떠나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특별한 존재라고 자기를 인식하는 유년기-청소년기를 지나서 우주를 이루는 셀수없이 많은 똑같은 물질 중 하나로 되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는 황혼기... 그 둘 사이를 이어주는 청년기-장년기에는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걸까?
어느날 문득 뒤돌아보니...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특별한 존재인 나를 지나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로 도착하는 것이 전체 여정이라고 했을 때 그 가운데 어디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키워드는 평범함인 것 같다. 그런데 이 평범함이 단어의 느낌과는 달리 전혀 평화롭지 않다. 갑자기라고 느낄만큼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에게로 습격해 들어온 평범함들이 나의 삶들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고 있다. 나의 삶에 침윤해 들어온 평범함이 왠일인지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작성하고 있던 여러 블로그 글들과 공부하다가 잠시 끼워놓은 책갈피들을 무기력하면서도 허무한 감정으로 쳐다만 보다가 아무렇게나 방치해두고 모든 걸 일순간 멈추어 버렸다. 왠지 그래도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모든게 끝나버려도 별일 아니지 않을까라는 다소 극단적인 생각들도 함께.
모든 것은 "나도 그냥 평범한 인간일뿐이라는 자각"에서 시작되었다.
1. 첫번째 평범함 : 학부모라는 괴물
학부모들 중에는 괴물이 있다. 물론 당연히 1~2명의 학부모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한 학교에 예를 들어 1000명의 학부모가 있을 때 4~5명의 학부모만 그런 모습을 보여주니까 비율로 따지자면 1%도 안된다. 거대한 푸른 호수에 검정색 물감 몇 방울이 떨어졌다고 해서 호수가 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전히 호수는 푸르다. 하지만 자연과는 달리 인간 세계에서의 부정적 기운은 쉽게 긍정적 기운을 압도해 버리는 듯 하다. 지금 학교에서는 괴물의 모습으로 느껴질만큼 공포를 안겨주는 학부모가 무서운 얼굴로 찾아와 그 학부모와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모든 선생님들의 교육력을 갉아먹어 버린다.
괴물이라는 너무도 심한 모욕적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자기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 쯤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자기 소유물이나 물건으로 취급하는 행동은 동화를 보아도 그렇고, 영화나 소설을 보아도 '괴물'들이나 하는 일이다. 누군가 한 사람의 인격과 고유한 인생을 무시하고, 그 인간을 자기 물건으로 취급하려 한다면 그런 사람은 '괴물'이라고 충분히 불릴만하지 않을까?
최근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괴물처럼 보이는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조그마한 스크래치라도 생기려고 하면 그로 인해 터져나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이성을 잃는다. 내 아이의 성장을 교육적으로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물건이 망가진 것을 보상받으려 하는 컴플레인의 기술을 발휘한다. 마치 내 자동차에 스크래치가 생겼을 때 참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운전자들과 오버랩된다. 대표적으로 요즘에는 "누가 너에게 싸움을 걸어오면 니가 먼저 때려라. 그리고 무조건 한대라도 더 많이 때려라."라고 가르치는 부모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빠, 엄마가 책임을 질테니 너가 하고 싶은대로 폭력적인 행동으로 대응해라"라는 메세지를 가정에서 아이에게 끊임없이 세뇌시키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아이들은 혼란스러워 한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학교폭력예방교육과 가정교육에서 지향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을 조장하는 '그런 학부모'들은 자기가 누구의 뭘 책임질 수 있다고 감히 저런 소리를 아이에게 함부로 하는 걸까? 기껏 책임을 진다라고 하는 것이 '돈'을 내놓겠다는 것이거나 '전학 가버리면 그만이라는 협박'이면서 말이다. 더 힘빠지게 하는 것은 그마저도 공염불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게나 자신만만하게 자기 자식에게 멋진 척 했던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학부모는 책임을 지는 어른의 모습보다는 기꺼이 괴물이 되려한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자기 과실비율을 줄이기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일단 우기면서 목소리를 높이며 남탓부터 하기 바쁜것처럼, 학교폭력이 발생하게 되면 최대한 언성을 높히고 모든 것에 꼬투리를 잡으면서 상대방의 잘못만을 찾아내고 자신은 최종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피해자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진짜 자기 아이가 피해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 단연코 아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이다. 아니...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이의 성장이나 문제의 교육적 해결은 애초에 관심대상이 아니다. 과실비율을 자기한테 유리하게 책정하여 '가성비' 높게 끝내려는 생각밖에 없어 보인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친구들이 건들면 참지 말고 맘껏 폭력적인 행동을 해라"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 유지, 발전시키는 교육의 장"에서 고개를 돌려버린다. 아이들도 자기들끼리의 인간관계로 구축한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자기 멋대로만 행동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으며 폭력적인 성향까지 있는 인간을 우리는 '망나니', '개차반' 등이라 부른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그런 인간은 환영받을 수 없다. 당연히 그런 아이는 좋은 친구관계를 맺지 못한다. 갈등이 있을 때 그 속에서 친구와 온 마음, 온 몸으로 부대끼고 견뎌내야만 관계를 맺는 힘이 길러진다. 주먹부터 나가고, 욕을 달고 살면서 자기 입장만 고수하면 결국 친구들은 곁에서 떠나간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친구들이 떠나가게 되면 상황은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더 심란해진다. 부모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형성된 불량한 품행이 원인이 되어 감정적인 외톨이가 된 아이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학부모는 반대로 완전한 괴물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된 훈육이 만들어 낸 아이의 망가진 인간관계에 대해 반성을 하기는 커녕 다른 친구들이 자기 아이를 따돌리게 된 현재에만 집중하여 자신들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무구한 피해자'였을 뿐이고 자신의 아이가 저질러 왔던 폭력행위로 대표되는 수많은 각종 문제행동들은 정당방위였다고 소급하여 믿어 버리는 무적 상태로 진화한다. 잘못은 다른 친구들에게 있었는데 오히려 학교와 교사들이 제대로 된 원인진단 및 문제해결을 하지 않은채 자신과 자기 아이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기만 했다며 학교를... 교실을 파괴하려든다.
아참 오해를 살까봐 급하게 한가지만 첨언한다. 모든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사실은 피해를 받을 만한 원인제공을 했다고 말하고 있는게 아니다. 사회에서는 모든 사건을 퉁쳐서 "학교폭력"이라고 단순하게 이름붙이고 있지만 학교폭력에 관계된 학생들이 만들어내는 "실제 현상"은 단일 스펙트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의 케이스들이 "학교폭력"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모여있다. 내 경험상(물론 내 경험이 지엽적이고 특이한 것일수도 있다.) 뉴스나 드라마에 나오는 "일방적인 괴롭힘"과 악마로 그려지는 "가해자"들은 학교폭력사태의 주류가 아니다. 말 그대로 특별한 사건이니까 영화로 만들어지거나 뉴스에 나오는게 아닐까? 학교폭력사태의 주류는 정말로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일상의 사건들이다. 그래서 "교육적 해결"이 무엇보다 앞장서야만 본질적인 해결을 할 수 있다. 지금처럼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해결하려는 관점이 교육적 해결을 짓누른다면 학교폭력의 공포는 더욱 심해지기만 할 것이다.
3년차 교사였던 시절, 내가 근무하던 학교 근처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 하나를 전해듣게 되었다. 자기 아이 담임을 맡게 된 동교 교사에게 수시로 선물 공세를 하던 40대 남교사 A에 대한 이야기였다. A교사는 자기 아이 담임을 맡게 된 동료 교사 B에게 수시로 선물 공세를 했다고 한다. 마침 B가 나이도 많고 교직경력도 많은 선배였기에 훈훈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존경의 의미와 잘 부탁한다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섞여 A와 B는 좋은 관계, 바람직한 관계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A가 B에게 찾아가서 욕설을 퍼붓고 멱살잡이와 주먹질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A의 자녀가 B의 학급에서 학교폭력과 관련된 일로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새내기 교사였던 나는 A교사를 향해 혀를 쯧쯧찼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이 가정에 전해질 때 얼마나 왜곡, 날조되는지... 오염된 정보들에 대해 티끌만큼의 이성적, 합리적 사고도 하지 않고 분노부터 폭발시키는 학부모가 얼마나 학교와 교사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직·간접적으로, 그리고 새내기라서 처음으로 겪게 되던 때라서 그랬다.
누구보다 교실의 상황을 잘 아는 교사가, 교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이면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교사가, 그리고 얼마전까지 존경한다면서 선물공세를 퍼붓던 교사가, 자신의 자녀가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상황파악도 제대로 안 해보고 다짜고짜 달려들어 몰지각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솔직히 A교사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비슷한 에피소드들을 들을 수 있었다.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하는 학부모가 알고보니 유치원 원장이었더라(참고로 요즘에는 부모직업을 담임교사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아니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슨 엄청난 비리와 범죄인 것처럼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버렸다. 부모의 직업을 알면 담임교사가 아이를 차별하게 된다느니, 부모의 직업은 아이의 교육과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해서 안 알려주고 싶은데 교사들이 불순한 의도로 알아내려고 했다느니 하는 말들과 함께!!! 동시에 그러면서도 학부모들은 지식전달교육이 아닌 아이의 적성과 특기를 키워주는 교육을 하라고 교사들을 나무라거나 조롱하기 바쁘다. 부모의 직업은 아이의 성격, 특성, 생활습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들 중 하나라는 기본적인 교육적 인식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스스로가 대단한 전문가라고 여기고 어깨에 힘만 잔뜩 주고 있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뭐 아무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말이 안통하는 수준 이하의 학부모들은 높은 확률로 학교선생님이라는 말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당연히 유치원 교사와 초등 교사 에피소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학교 교사인 학부모가 와서 난리를 피우고 협박까지 했다는 사례도 종종 있고, 대학교수들이 난동을 부리며 천박한 말들을 쏟아내는 행태들도 상상 이상이다. (교수에게도 연구자의 정체성뿐만이 아니라 교육자의 정체성이 있을테니 끼워 넣었다.)
교육자들은 적어도 다른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교육의 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 그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적어도 나는 그러지 않을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을 키워갔다. 교육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교육적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교육자의 관점을 항상 우선에 둘 것이라고 말이다.
...어느덧 내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교사인 내가 우리 아이의 담임교사와 "학부모 상담"을 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학부모로서 담임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하나의 "평범함"이 내 안으로 쑥 빨려 들어왔다. 나도 학부모라는 괴물일수밖에 없다는 "평범함"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전화상담만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화상담의 특성상 핵심만 말하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 아이에 대해 담임교사가 했던 첫마디에 내 기분은 헝크러지고 말았다.
"우리 ㅇㅇ는 막 눈에 띄거나 잘하는게 보이지는 않지만, 특별히 무언가를 못하는게 있지도 않은 '평범한 아이'예요."........
나도 초등교사이기에 학교의 언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나의 딸이기에 누구보다 내 아이를 잘 알고 있지만, "평범한 아이"라는 담임교사의 선언은 비수처럼 내 가슴에 날아들어와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뭘 바랐던 걸까?
'대단한 아이', '특별한 아이', '멋진 아이', '예쁜 아이' 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평범하다'라는 것이 나쁜것인가?
딱히 잘하는게 없다는 것이 불쾌했던 걸까?
불쾌함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아이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진짜 뭐가 문제였을까?
물론 학부모 상담에서 담임교사가 아이의 칭찬만을 해줘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학기초인 4월이면 담임교사가 학생들과 만난지 1달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아이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파악할 시간이 물리적으로 부족하다. 따지고 보면 내 아이에 대한 담임교사의 진단은 특별히 틀린 말이 아니다. 분명 내 아이는 담임교사가 말한 특성이 있다. 부모인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커지는 불쾌감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상담을 하는 내내 오만가지 생각들이 내 머리속에 소용돌이 쳤다. 결정적으로 상담의 후반부.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 궁금한 걸 몇가지 질문했을 때 보였던 담임교사의 태도가 흐릿했던 불쾌감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담임교사는 나의 질문에 단 한가지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 내밀한 질문들이 아니고 '평범한'질문들이었는데 말이다.
내 아이의 담임교사는 '아직 한달밖에 같이 생활하지 않아 파악하지 못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실 담임교사의 말이 당연한 것이고 솔직한 것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도 교사니까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시작부터 망가져버린 나의 기분탓인지 아이에 대해 무엇하나 파악하고 있는게 없다라는 담임교사의 대답은 '무성의함과 불성실함'으로 받아들여졌다.
순간 가끔 학교에서 만나는 '교장-교감 승진에 실패한 후 무기력하게 지내는 원로교사'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마침 담임교사는 나이가 많은 할머니 선생님이었다.(요즘 50대는 할머니도 아니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할머니로 보인다고 한다.) 퇴직과 연금만을 바라보며 교과서 진도를 기계적으로 나갈 뿐인 학생에 대한 애정없는 교사가 실제로 존재한다. 같은 학교에서 몇번 보았으니 그들이 존재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가끔 동료교사로 옆에서 보기도 했으니 그런 교사가 어떤식으로 아이들을 대하는지 잘 알고 있다. 상담을 끝내고, 나는 좀 더 멋진 교사를 만나지 못한 우리 아이의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지기에 이르렀다.
불쾌감에서 시작된 분노를 어떻게든 표출해야만 했다. 연말에 하는 교원능력개발평가에서 학부모로 참여할 때 '솔직하게' 낮은 점수를 매겨서 '내 분풀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불쾌했다는 걸 알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앗!!!!!!!!!!!!!!!!!!!!!!!!!!!
내가 이런 생각을 떠올리다니... 학교의 일을 교육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기적인 태도만을 보이는 학부모들을 괴물이라고 조롱했던 내가 이런 마음을 먹다니...
결국 나도 어쩔수 없는 괴물이라는 말인가...... 학부모라는 괴물.... 학부모가 된 이상 나 역시 별 수 없이 괴물로 변해 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순간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2. 두번째 평범함 : 10년차 매너리즘
초임 교사였던 시절, 그 당시 지금의 내 나이쯤 되는 선배교사들이 진심을 담아 나를 비롯한 후배들에게 해 주었던 충고의 말들이 있다.
"교직 10년차 이후부터의 생활을 지치지 않고 해 내려면 학교와 상관없는 취미 하나쯤 만들어 놓아야 해. 꼭이야. 교사 생활을 한지 10년쯤이 되면 매너리즘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거든. 그 때 마음쏟을 활동들이 필요해. 학교와 수업, 교육과 전혀 관련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해."
한마디로 정리하면 위와 같이 핵심을 정리할 수 있다. 실제로 그 말을 했던 선배교사들 중 한명은 생활체육에 올인하여 운동에만 푹 빠져 살고 있었고, 다른 선배교사는 PC게임과 영화감상에 여가시간을 올인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것처럼 그 선배들은 교육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몸에 두드러기라도 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 당시 내가 궁금했던 것은 수업의 본질, 교육이 추구해야 하는 것 등이었는데... 최소한 그 선배들로부터는 배우지 못했다. 배운 것이 있다면 교사들끼리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은 낯간지러운 일이기에 피하는게 좋다는 교직계의 분위기였다.
나는 그 선배들을 좋아했지만, 존경하지는 못했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어쩔때는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도 저런 교사는 되지 말아야지... 아니 나는 그렇게 되지 않겠지라고 아무 근거없이 믿어버렸다.
...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 어느덧 내가 그 때 그 선배들만큼의 나이와 연차가 되었다.
놀랍게도 잠시 잊고 살던 그 선배들의 말이 번뜩 떠올랐다. 선배들의 말은 거짓이나 과장이 아니였다. 군복무와 육아휴직 기간을 빼고 교실에서 실제로 수업에 참여한 시기만 계산했을 때 딱 10년차가 된 나는 아무런 징후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더 좋은 교육을 위해 고민하면서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한 의구심이 갑자기 피어올랐다. 교육에 대해 고민하고, 수업을 연구하는 노력들의 나아갈 길이 막혀서 더이상 움직일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쯤에서 멈춰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별로 지칠만큼 노력한 것 같지도 않은데 지친 걸 보니 매너리즘이 맞는 것 같다.
이런 마음 상태가 쉽게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물론 갑자기 찾아온 것이니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더 깊어져서 오랫동안 함께 할지도 모를 일이다... 뭔가 해법을 찾지 못한채 교사로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2배의 시간을 더 지내야만 한다는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니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무기력하다"고 비난했던 교직선배들이 떠올랐다. 마침 우리 아이의 담임교사가 그런 교사여서 요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 보니 때마침 생각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쨋든 "무기력, 불성실, 무성의"한 나이 많은 선배교사들이 조금 달리 바라봐지는 내 안의 변화가 생겼다. 그분들도 지금 내가 마주한 "매너리즘"을 진작에 겪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 자체로 조금 대단해 보였다. 땅으로 꺼지는 이와 같은 기분을 견디고 견디며 그런 경력까지 버텨왔다는 생각이 드니 누구에게 향하는 감정인지는 애매했지만 어쨌든 짠한 기분이 느껴졌다.
나도 그냥 평범한 인간일뿐이었다. 평범한게 나쁜게 아니라고 말은 하면서 나도 모르게 특별하고 싶었나보다. 나의 평범함을 받아들여야 겠다고 결심하니 이제는 다시 멈췄던 글쓰기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꽤 오래 주저앉아 있었지만, 지금쯤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제부터 쓰게 되는 글쓰기는 왠지 지금까지와는 다르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내가 살짝 변한 것 같으니까 말이다. 무너진 일상속에서 무엇이 피어날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