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교육기관이다. 하지만 교육기관이라고 해서 교육만 존재하는 신기루 같은 기관은 아니다. 현실의 기반 위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라는 기관을 온전히 “운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행정”이라는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행정을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학교는, 학교 구성원들에게 행정을 세분화하여 나누어 맡긴다. 비슷한 성격의 업무를 묶어 부서를 나누고, 예를 들어 “인사, 교무부, 연구부, 생활부, 체육부, 과학부, 안전부, 방과후, 문화예술, 예산, 시설, 전산, 보안, 보건, 급식 등”, 그 안에서 총괄책임자를 부장이라는 이름으로 임명한 다음 또 그 안에서 업무를 세세하게 나눠 몇 사람이 나눠 처리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 학교에서는 나눠진 행정업무 중 무엇을 누가 맡는가 하는 문제가 매년 발생한다. 언제나 새학기를 시작하기 전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어떤 때는 크게... 또 어떤 때는 작게... 그렇지만 소용돌이는 반드시 휘몰아친다. 업무담당자가 되어 업무처리에 대한 자율적 권한을 부여받은 뒤 학교 운영 방향에 뭔가 진취적인 영향을 줄 수나 있다면... 책임감이라도 생길터인데... 오히려 정반대로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함부로 쓰이는 노예같은 일꾼으로 전락해 버리니까 말이다. 얼굴을 붉히든 다양한 꼼수로 거짓 이유를 만들어 내든 업무를 정하는 순간만 잘 모면하면 1년이 편해지고, 거절하지 못해서 업무를 맡게 되면 여기저기에서 시달리며 1년이 괴로워지니까 늘 학기말이 되면 부정적 감정들이 부딪히고 서로를 상처를 낼 수 밖에...
물론 학교도 관련된 시스템을 만들었다. 최대한 갈등을 줄이고자 “인사규정”이라는 명목하에 학교근무년수나 경력, 나이 등에 점수를 매겨 순위를 정한뒤 업무를 배정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승진이라는 근사한 이름의 영광스런(!!!) 교감과 교장”이 되기 위한 경쟁에 업무 관련 점수를 넣어서 자발적으로 업무를 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 두가지 시스템에 의해 선생님들 사이의 갈등은 최소한으로 조절되며 그렇게 학교는 돌아가고 있다. 사실... 하나 빼먹은 방법이 있는데, 그냥 교장과 교감이 권위적이고 강압적으로 배정하는 학교가 아직도.. 여전히 있다.
학교 행정업무와 관련된 소용돌이 중에서 최근 들어 갈등이 심화되어 가는 영역이 하나 있다. 갈등의 심화는 비교적 최근일이다. 그동안은 권력관계에 의해 그저 눌려있기만 하던 불만들이 교사노조의 활성화와 사회분위기 변화, 그리고 교사 커뮤니티의 활성화 등으로 곪아 터져나오게 되었다.
학교에는 전통적으로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될 행정업무(교육과정, 학생생활 등)가 있는 반면 새롭게 추가되거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행정업무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공기청정기 관리나 CCTV 관리 같은 업무이다. 과거에는 없었으나 환경오염의 심화와 안전기준 강화 등의 사회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학교에 부가되는 업무가 바로 그것이다. 나름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행정업무 배분 생태계에 위기가 찾아오는 순간이다. 누군가는 그동안 하지 않았던 업무를 추가로 맡아야 한다.
학교라는 공동체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왔을까?
그동안에는 수업하는 교사들에게 그러한 업무들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연하게 떠넘겨 왔다. 초등학교 한정으로 행정업무 배분의 권한이 있는 교장들이 강압적으로 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바로 교사들이다. 학교 내에 공존하는 다른 직군들에게 강압적이거나 불합리한 요구를 했다가는 노동청이나 같은 직군들이 결성한 노조에 의해 공격을 받을지도 모를 위험이 있지만, 교장도 속했었던 교사들은 교장의 갑질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속에서 교사들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교사 커뮤니티나 교사노조에서의 소통으로 불합리한 일들을 드디어 불합리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법률적 근거를 갖추는 등 다양한 대응논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자 드디어 권력게임의 장이 펼쳐졌다. 누가 목소리를 크게 내서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교사들이 행정업무를 줄이고 수업에 집중하는 학교가 되거나, 행정직들이 해야할 각종 업무를 교사들이 떠안는 학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학교에서 하나의 사건이 펼쳐졌다. 안타깝게도 우리학교가 후자의 학교라는 걸 뼈져리게 깨닫게 만들어 준 사건이었다. 교사들이 수업에 대한 이야기, 교육을 향한 소통과 연수로 방과후를 보내는게 아니라 각자의 교실에서 행정업무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해야 하는게 바로 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교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학기말 교육과정 반성회 시간...
업무분장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꼭지에서 나온 의견이다.
학교 운동장 모래 소독, 학교 체육시설(철봉, 정글짐, 시소, 미끄럼틀) 안전 점검, CCTV 관리, 정보보안, 공기청정기 관리, TV구입, 컴퓨터 구입은 교육청 시설과나 안전총괄과에서 공문이 오기 때문에... 즉 교육청의 장학사가 아니라 주무관(행정직)이 자기들 업무 처리를 위해 학교에 요청하는 업무이기 때문에 단위 학교의 주무관(행정직)들이 있는 행정실에서 공문을 받아 처리하는 걸로 업무를 조정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런 공문에서 요구하는 결과보고는 주무관들이 진행하는 업무에 속한다. 학교 놀이터 모래소독을 교사들이 업체선정해서 사업을 진행할리가 있겠는가.... 행정직들이 하는 일이다. 또 CCTV 업체를 선정해서 CCTV를 설치하고 CCTV를 관리하는 걸 교사들이 사업을 진행할리가 있겠는가... 이 역시 행정직들이 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예를 들어 교육청이 공문으로 학교에 설치된 CCTV 계약일, CCTV 화소, 설치장소 및 설치개수 등을 양식에 기입하는 자료 집계를 요구하면 교사는 알 길이 없다. 교사가 업무를 처리하려면 행정실에서 관련 엑셀파일에 해당 내용을 채워줘야만 한다. 담당 교사는 그걸 받아서 공문으로 제출만 하는게 전부이다. 어차피 제출만 하면 되니까 별일 아니라고 그냥 해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교육청 시설과에서 주무관이 공문을 보내고 단위학교 행정실에서 시설관리 주무관이 바로 받아서 처리하면 될 일을 이상하게 교사가 그 중간에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끼여있는 것이다. 교사가 중간에 끼어있든 없든 행정실 주무관은 어차피 자신의 업무이고 자신만이 그 정보를 취급하는 사람들이므로 교사에게 엑셀파일을 넘겨버리는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자료 집계를 하면 불필요한 절차도 간소화되고 업무 속도도 몇배로 빨라질 것이다.
엑셀파일에 내용 채울 업무 처리 과정을 생략하고 행정실에서 자료 집계에 바로 입력하면 되니까 말이다.
담당 교사가 의견을 냈더니 M 행정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하나를 넘겨받으면 이것도 넘기려 하고 저것도 넘기려 해서 결국 다 넘어올테니 받을 수 없다. 그냥 하던대로 담당 교사가 처리하자. 행정실에서 잘 협조!! 해 주겠다."라고 대답한다....
최소한의 핑계도 대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저 답변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럼 다 넘겨받으면 되잖아요.” 라고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고 행정실장 입만 바라보고 있던 교장과 교장 덕분에 아무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동안 행정실에서는 자기들 행정업무를 교사들에게 떠넘길 때 주로 두가지 중 하나의 방법을 택해왔다. 첫번째는 행정실이 행정 업무가 많은데 비해 인력이 3~4명이라 버겁다는 감정적 호소였다. 우리도 힘들다는 읍소에 이번 한번만, 이 업무 하나만 하면서 교사들이 업무를 맡아온 것이다. 두번째는 “학생”과 관련된 업무는 교사가 맡아야 하지 않느냐는 아전인수 식 주장이다. “놀이터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거니까 모래 소독이나 놀이기구 안전점검은 교사 업무다.“, ”CCTV에는 학생들이 찍히니까 CCTV관리는 교사 업무다.“라는 식의 단순한 논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무작정 업무를 미뤄왔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M 행정실장은 내가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다. 행정실 업무에 비해 사람이 부족하다라는 감정에 호소하는 핑계나 "학생"과 관련이 되어 있으니 교사가 맡아야 한다라는 아전인수 격 핑계도 대지 않는 뻔뻔함을 모든 교직원이 있는 자리에서 내보였다. 순간 나는 23년 올해 유행하는 하나의 밈이 생각났다.

“그래서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ㅋㅋㅋ”
라는 밈이다. 나에게 해를 가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나의 실수나 잘못을 사과하거나 미안해 하지 않고... 최소한의 겸언쩍음도 없이 뻔뻔하게 철면피를 까는 태도를 취할 때 쓴다. 올해의 밈이라고 할만큼 자주 쓰이는 밈 중 하나를 인터넷 공간이 아니라 현실에서 마주칠 줄이야...
“그래서 니가 뭘 할 수 있는데는”는 철저하게 권력관계에서 내가 우위에 있음을 느끼는 자가 말하는 상대를 깔보면서 쓰는 말이다. 다양한 상황에 응용해서 쓸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모욕하며 희열을 느낄 때나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감히 현실에서는 쓸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M 행정실장은 저 말을 함부로 썼다. 물론 “그래서 니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라는 워딩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하나 받으면 다 넘어올테니까 하나도 받을 수 없다.”라는 뻔뻔함이 나는 “그래서 니네가 뭘 할 수 있는데”로 들렸다.
...M행정실장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걸까? 우리 학교의 기울어진 권력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어떠하든 행정실장은 자기들이 교사들보다 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행정실에서 교사들에게 했던 다양한 갑질들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번 교육과정 반성회에서 행정실에 대한 또다른 건의사항도 나왔는데 그것도 역시 행정실 갑질이었다. 하지만 M행정실장의 대꾸에는 두번째 건의사항에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또 역시 “그래서 니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학교에서 행정업무를 조정하는 책임은 교장에게 있다. 교장은 행정실장의 만행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눈을 감고 침묵했다.... 그리고 그는... 교육과정 반성회가 끝나고 행정실장과 학교 근처 “국밥집”으로 웃으며 걸어갔다... 왜 학교에서 괴상한 갑질이 만연해 있고 학교 민주주의를 찾아볼 수 없는지... 국밥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야만의 시대가 이곳 학교에 어떻게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교사들이 아이들과 수업하는 일과 시간... 수시로 학교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공원으로 걸어나가 함께 ’담배‘를 태우며 웃고 떠드는 그들... 교육과정 반성회가 끝나고 둘만의 저녁타임을 갖고 술잔을 기울이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로 야만의 시대인... 요즘 현실과 참으로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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