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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X2]선(S)생님의 시(S)선

[Sx2]생각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설득,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까? 교사들의 금요일 조퇴에 관한 논쟁을 지켜보면서....

by Teachography 2021. 7. 19.
출처 : https://mnews.joins.com/article/23586045#home

2021년 7월 19일 현재. 페이스북에서 살짝 이슈가 되고 있는 논쟁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교사들의 금요일 조퇴'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논쟁이다.


그동안 교장, 교감이라는 소위 관리자들이 교사들의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인 연가, 조퇴 등의 사용을 자의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제한해 왔던 것을 '정상화' 시키자는 주장
VS
교사의 특수성과 본분을 망각한 과도한 권리 주장으로 그나마 있던 권리마저 박탈될 수 있으니 '비정상적' 요구를 그만두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라는 주장

수업 없으면 조퇴하고 휴식? 교사 연수 기준 시도별 제각각

수업이 없는 방학을 이용해 교사들이 지난 학기를 점검하고 새 학기를 준비하라고 만든 ‘근무지 외 연수’를 휴가처럼 사용한 것이다. 대전은 유·초·중등 교사 모두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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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두 개의 주장이 서로 맞부딪치고 있다. 나도 이 주제를 접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어느 한쪽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의견을 가지게 되었으며, 논쟁을 지켜보다가 세대 갈등인양 한쪽은 주로 비교적 젋은 교사들이 의견을 많이 내고 있고 다른 한쪽은 대체로 나이가 많은 고경력 교사들이 주로 의견을 낸다는 식의 특징을 발견하여 이 논쟁 자체만 가지고도 '블로그 글'을 쓴다면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 삼아 글을 써볼수도 있겠으나 이번에는 조금 다른 관점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1. 음악평론가 김갑수의 지성 :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란 선악이나 옳고 그름의 대결이 아니라 어느 쪽이 한명이라도 더 많은 수를 이루느냐의 싸움이다.


나는 더 이상 '정치'로 언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하니 왠지 뉘양스가 그 전에는 자주 한 것처럼 되어 민망하다. 내가 해 온 일이란 전면에 나서거나 치열한 언쟁이 아니라 지극히 지극히 지극히 소극적인 방구석 분노 정도를 말하기에 솔직히 '언쟁'이라는 거창한 단어는 나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 대학교 때부터 'ROTC'라는 신분으로 정치적 금치산자가 되어 공무원, 특히 공교육 교사의 신분으로 이어진 지금도 정치적 금치산자의 정체성이 강제되고 있다는 핑계를 방패삼아 줄곧 소극적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정치적 의견을 가지는 것에는 관심을 놓지 않았다. 꾸준히 정보를 접하면서 분명한 정치적 의견을 내 나름대로는 늘 세워놓고 있었다.

그렇기에 명절이 되어 친척들이 모이면 문제가 발생하였다. 친척들의 이야기 주제에는 반드시 정치가 등장한다. 나는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시면 주로 듣는 입장이었지만, 말은 못해도 마음속으로는 부글부글 부아가 치밀었다. 친척 중 몇몇은 전혀 말도 안되는 헛소리들을 소위 '가짜뉴스'에 기반하여 단정적으로 하곤 했다. 답답함을 누르다 누르다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반대 의견을 낸다. 그러면서 한가지 '중요한 지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정치적 논쟁에서 논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지점이다. 논리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사실'에 있다. 서로 의견이 다른 두 사람이 논리의 전제로 삼고 있는 '사실'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180^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달랐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한동안 휩싸였다.

처음에 나는 문제의 원인을 편향된 '뉴스 소비'에서 찾아냈다. 내 입장에서 완전히 말도 안되는 '가짜뉴스'에 기반한 '헛소리'를 지껄이는(표현이 많이 심하지만, 이런 단어 정도는 되어야 그 당시의 내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기에 무례하지만 쓰려고 한다.) 몇몇 친척들은 특정 언론을 통해서만 뉴스를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특정 언론 좀 그만 보라고 그들의 '헛소리'를 공격했다. 맨날 저질 언론에만 푹 빠져있으니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니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곧 문제에 봉착했다. "특정 언론에만 매몰되어 있지 마라."라고 내가 한 말이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나는 뉴스를 어디에서 접하고 있는가?
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누구의 입을 통해 전해 듣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논리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는가?

나도 내 지적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도 특정 언론에서만 뉴스를 접하고 있고, 특정인들의 입으로만 '사건'을 접한 뒤, 특정인들의 논리만을 내면화하여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나는 이쪽에 있는 사람은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으로 신뢰하고 있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옳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는 데 반해 '답답한 친척'은 나와는 정반대로 바라보고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깨닫게 되자 '헛소리를 하는 친척'을 비난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공격을 하면 할수록 그 화살이 결국 나에게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비난은 종국에 가면 '전제로 삼고 있는 사실'로 향해 갈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사실'의 존재가 전혀 합의를 이뤄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만날 수 없어 보였다. 보통 논쟁이 격화될 때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감정이 폭발하는 이유도 이런 관점으로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자명한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대가 무지하고, 무식하고, 부도덕하며, 비윤리적으로 보여 '인간 이하'로 여겨지는 게 완전히 '인간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 때쯤 음악평론가 김갑수님의 말씀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상대편을 악마화하고, 물리쳐 없애 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제도가 아니다. 선과 악이나 옳고 그름의 대결이 아니라, 단지 어느 쪽이 1명이라도 더 많은 다수를 이뤄내느냐의 싸움일 뿐이다."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동안은 현실에서야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이상적으로는 '정의'의 편에 선 사람들이 자명한 올바름으로 부도덕과 비윤리를 몰아내야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편의 이기심과 부정의, 멍청함을 반박할 수 없는 진실과 완벽한 논리로 날려버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정의의 세상'이 찾아올 것 같았다. 하지만 애초에 'Democracy'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민주주의는 "진짜 정의", "진짜 주인"를 찾아가는게 아니라, 다수 지배를 제1원리로 하는 제도라니...

'옳고 그름이란 색안경'을 거둬내니 들끓는 감정과 견디기 힘든 답답함이 사라졌다. 상대방을 증오하는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내 생각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과 우리 편을 형성하는 것에 좀 더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내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을 견주어 보는 것에는 적극적이지만, 접점이 없을 때는 미워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깔끔하게 악수한 다음 뒤돌아서는 것이 가능해 졌다. 그러다보니 '선'을 완전히 넘어가 있지만 않으면 필요할 때 공동체를 만들어 다시 힘을 합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쯤에서 정치적 주제로 '소모적 논쟁'을 할 필요성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적(일상의 정치도 포함하여) 논쟁이 사라지자 놀라운 일이 하나 생겼다. 정당(다수 지배를 완성시킨)한 과정으로 일단 하나의 의견이 결정되면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발벗고 나설 마음의 자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내가 낸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내가 옳다고 믿는 의견이 배제되면, 최대한 소극적으로 행동하여 협조하지 않거나 사사건건 반대의견을 고수하여 공동체의 발목을 끊임없이 붙잡으려고만 했다. 아니면 최소한 늘 도끼눈을 뜨고 꼬투리나 잡으려고 하면서 상대방이 실패하길 바랐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었다. 반대로 만약 내 쪽이 '다수'가 되었을 때 반대의견을 가진 상대편이 정당한 과정을 거쳐 결정된 내 쪽의 의견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다시 이런 과정이 몇번 반복된다면... 머지않아 'Democracy'는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상대를 저주하고 증오하고 물리치려고 하지 말고 내 의견을 선명하게 주장하면서 나의 편을 성실하게 늘려갈 것
대원칙인 다수 지배가 완성되면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진심으로 내 힘을 온전히 보태고 협력할 것
다시 다수 지배를 위한 저울질이 시작되면 주눅들지 말고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과 힘을 합쳐 다수를 만들어 나갈 것


음악평론가 김갑수의 지성으로 하나의 삶의 자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온 마음의 평화와 함께 새로운 눈이 생겼다.


2. 교육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해서 학교 구성원 모두가 합의에 이르는 게 가능할까?



모두에 이야기했듯 "금요일 조퇴문제"에 대한 논쟁이 페이스북에 등장하였다. 보통의 논쟁이 언제나 그렇듯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각종 법령과 논리들이 댓글로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상대방의 논리나 철학을 자신의 논리와 철학으로 무릎 꿇리기 위해 모두가 전력을 기울였다. 점점 댓글이 이어지다 '공통의 사실 하나'가 양쪽 모두에게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되면서 드디어 분위기는 험악해지는 반전을 맞이하였다. 이제부터는 '당신의 견해를 존중하긴 하지만...' 따위의 존중과 예의의 태도는 설 자리가 사라졌다. 무지하고, 부도덕한 자로 추락해 버린 서로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공통의 사실 하나'란 바로 가장 강력한 "팩트"인 "법"이었다. 똑같은 '법'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어 자기 주장을 펼치는 와중에, 상대방이 똑같은 법을 다르게 해석해서 전혀 다른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으니 대화가 불가능해 진 게 당연했다. 그리고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에 대해 적의의 드러내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이 논쟁을 지켜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 순간 '페이스북'을 빠져나왔다.


지금까지 학교에서는 조금 과장해서 '논쟁'이란 것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장이 절대적 권한을 틀어쥐고 있는 초등학교에 한정해서 말이다.(중등, 고등, 대학은 내가 경험해 보지 않아서...) 기껏 교사들 전체가 논의를 거쳐서 하나의 의견을 모았더라도 학교장 한명이 윤허(!!!)해 주지 않으면 모두 쓸데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교사들이 한시간을 치열하게 의견을 모았든, 한달을 끊질기게 의견을 모았든 아무 관계없다. 모든 것은 학교장 한명의 의견으로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시대가 바뀌어감에 따라 조금씩 학교의 문화도 변해 가긴 했다. 2010년쯤 전후로 학교 문화에도 '민주주의'가 스며들게 된 것이다.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학부모, 교직원, 학생)을 종합해서 '의사결정'을 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바뀌어 가는 중이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는 학교마다 많이 달랐다. 평판을 신경쓰지만 시대정신에 뒤쳐진 학교장들은 교묘히 자기 의견을 흘려서 교사들이 눈치껏 전체의견을 학교장의 의견과 일치시키도록 분위기를 조장하는가 하면, 평판따윈 상관하지 않는 구시대의 적폐 그 자체인 학교장들은 여전히 대놓고 자기 의견을 밀어부치거나 갑질을 했다. 물론 시대를 선도하는 학교장들도 당연히 있다. 민주주의의 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학교 구성원들이 모두가 참여해서 '다수 지배'를 만들 수 있도록 분위기를 고무시킨 다음 그렇게 형성된 다수의 의견으로 학교를 이끌어나가는 학교장 말이다. 시대를 선도하는 학교장이 경영하는 학교, 학교 문화를 민주적 혁신한 학교가 전국적으로 점차 쌓여가는 중이니 구시대의 화석들이 많이 남아 있긴 해도 우리 교육은 절망적이기 보다는 희망적이다.


몇몇 '혁신 학교' 성공 사례가 유명세를 타면서 최근에는 너도 나도 학교 문화를 민주적으로 변화시키려고 꿈틀대고 있다. 우선적으로 교사들은 구성원들의 의견을 잘 모아야 '민주적 학교 문화'를 만들 수 있다며 일단 한자리에 모두 모여 교육적 주제들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다. 한자리에 모인 교사들은 공동의 철학을 세우려고 하거나, 공동의 교육과정을 계획하여 운영하려고 하거나, 공동의 특색 활동을 만들어 변화된 학교의 상징으로 삼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부담없이 같은 책을 읽고 책에서 길어올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공동으로 찾아 나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학교는 노력의 장 초입에서 곧 장애물에 부딪쳐서 주춤거렸다. 학교 문화 혁신 사례집이나 혁신학교 관련 주제로 출판된 도서, 혹은 사례 발표회장에서 전해들었던 '학교 구성원들의 민주적 의견나눔과 자발적 참여, 감동적인 헌신'을 일상에서 만나는 우리 학교나 옆 학교 등 현실에서는 실제로 경험해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흉내라도 내보려고 해도 학교 철학을 함께 세우려고 학교 철학을 세우는 방법을 배우고, 학교 교육과정을 함께 계획하여 운영하려고 교육과정 재구성 및 일관성 있는 학교 행사를 계획하는 방법을 익히며, 공동의 특색 활동과 내실있는 평가를 함께 하기 위해 특색 있는 학교행사와 과정중심평가 사례들을 모아 분석하다가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나버려 시간이 없었다.

1년이 지나면 학교는 일부 구성원들이 교체된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유경험자들이 있으니 완전히 똑같진 않아도 거의 비슷한 컨텐츠로 학교 철학을 세우는 방법을 또 배우고, 학교 교육과정을 계획하는 방법을 또 익히며, 특색 있는 학교행사와 과정중심평가 사례를 모아 또다시 분석하며 1년의 시간이 또 그렇게 흘러가고 만다. 이쯤되면 새로운 장애물이 솟아오른다.


바로 "참교사VS무임승차자 문제"이다.

매년 구성원들이 교체된다는 핑계를 방패삼아 정작 혁신은 없이 학교를 혁신하기 위한 '준비'만 반복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 앞장서서 학교 전체를 끌고 나가려는 '참교사(주로 기존 교사)' 무리가 출연하는 것이다. 참교사들이 세운 '바른 학교 철학'과 참교사가 '바르게 재구성 한 교육과정' 그리고 참교사가 '올바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계획한 각종 행사'들이 학교 구성원들 중 일부인 참교사들의 주도로 운영된다. 열심히 앞장섰던 교사들이 '딱히 자기 의견을 내지 않는 것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교사들'에게 불편한 감정이 생기긴 해도, 당장은 구성원들 대부분이 뿌듯한 보람을 느낄만큼 눈에 띄는 성과들이 많기에 바른 학교 철학과 바르게 재구성 된 교육과정, 그리고 올바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계획한 수많은 이벤트들에 가려 갈등은 조용히 묻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참교사' 무리도 일부는 학교를 옮기게 된다. 앞에서 강력하게 학교를 이끌어 갔던 동력이 약해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 운영이 원활하게 되지 않고,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게 된다. 조용히 묻어놓고 넘겼던 "참교사VS무임승차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심화되는 순간이다. 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아무 의욕이 없느냐고 참교사들이 무임승차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고조된다. 다시 성과를 내기 위해 학교 공동체가 선택하는 것은 주로 토의와 토론이다. 과거에 좋은 성과를 내며 전통처럼 자리잡은 기존의 학교 철학, 학교 교육과정, 학교 행사들을 되돌아보며 다양한 교육적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딱! 내가 경험 중인 현재의 학교들의 모습이 바로 지금 여기까지의 단계이다.


변화의 과정과 도달한 현재의 모습 속에서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장에 참여할 때나 미처 사람들한테 내놓지 못했던 생각을 '블로그'를 통해 업로드 할 때 내가 생각하는 '바른 교육관', '바른 교직관', '바른 인간관', '바른 아동관' 등으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저격해 왔다. 표현이 '저격'이라 뭔가 '분연히' 일어나 결연한 의지로 행동한 듯한 뉘양스를 풍기지만, 그저 소심하게 상대방의 이야기에 대해 말꼬리를 잡거나 논리적 허점을 찾아 '질문'의 형식을 빌려 곤란하게 만드는 행동을 한 수준이다. 나는 그렇게 상대방의 잘못된 논리를 '신박한 논리들'로 물리쳐 나가다 보면 점점 '좋은 학교'가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서서히 만들어질 것이라 얼마전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금요일 조퇴 논쟁'을 지켜보면서 음악평론가 김갑수 선생의 지성이 '교육의 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교육에 관한 담론의 장에서도 서로 같은 대상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으로 정반대의 입장에 선 상대방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짜 바른 교육", "진짜 옳은 아동관"을 구해 반대편에 있는 '정의롭지 못한 교육', '빈곤한 아동관'을 물리치려고 하거나 그러한 '악'을 교화시키려 해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가 더 '정의'롭느냐의 논쟁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게 만들 뿐이다.


일단, 지금까지 종종 써먹었던 나의 '블로그 글' 작성 방식부터 바꿔야겠다. 나는 나와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의 페이스북 글이나 책, 혹은 그의 발언을 녹취한 것을 인용한 뒤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히는 흐름으로 꾸준히 블로그 글을 써왔다. 상대방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병치시켜 놓고 내심 "어때? 내 쪽이 더 정의롭지?"라는 자만심을 높여 왔던 것이다. 이제 그러지 말아야겠다. 당장 '지금 쓰는 이 블로그 글' 바로 전의 포스팅이 딱 그런 식이었다. 상대편을 저격하는 것으로는 미움과 분노만 쌓일 뿐이다. 교육공동체를 이루어 모두가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데 힘을 모아야 하는데 그런 부정적 에너지는 걸림돌이다.

상대를 저주하고 증오하고 물리치려고 하지 말고 내 의견을 선명하게 주장하면서 나의 편을 성실하게 늘려갈 것
민주적인 방식으로 하나의 방향성이 정해지면 교육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진심으로 내 힘을 온전히 보태고 협력할 것
1년 후 다시 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 실망하거나 주눅들지 말고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과 힘을 합쳐 변화를 열심히 주장 해 볼 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