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약 10여년 전. 교사로 첫번째로 발령이 났었던 학교에서의 일이다. 그 당시 내가 발령난 학교는 광주 외곽지의 학교로 중심부 학교에 비해 이른바 옛문화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예를 들어 남교사가 결혼을 하게 되면 동료직원들이 교장, 교감을 모셔 놓고 신랑달기를 했다. 신랑달기를 할 때 신부가 될 사람은 그 학교의 교직원이든 아니든, 혹은 교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진 일반인이어도 학교의 피로연에 참석해서 짓궂은 요구에 응해야 했고, 교장, 교감 및 교직원들이 박장대소를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 뒤에야 결혼 축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학교 교사들 중 눈이 맞는 일이 일어났다. 같은 학교 남교사랑 여교사가 결혼까지 골인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교장, 교감, 부장들과 동학년 교사들 정도만 참석해서 피로연이 진행되는데, 같은 학교에서 커플이 된 후 결혼을 한다고 하자, 피로연의 규모가 커져서 전 교직원이 강당에 모이는 대규모의 피로연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학교 친목행사랑 함께 이루어지면서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할 레크레이션이 진행되었다. 학교 막내 교사가 사회를 보고 결혼할 커플에게 몇 가지 미션을 주거나 둘에게 같은 질문을 하여 각각 답을 하게 하는 등의 프로그램으로 피로연이 채워졌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고, 행사를 마무리하기 전 참석한 교사들에게도 마이크가 주어지며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 주는 시간에 나의 차례가 되었다. 사회가가 나에게 준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분리수거랑 음식물쓰레기는 누가 버려야 할까요?"
이 질문에는 정답이 존재했다... 출제자가 의도한 정답말이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는 분위기가 달라서 분리수거랑 음식물 쓰레기만 남자!!가 버려줘도 남자가 스윗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결혼 분위기가 한낮이라면 그 당시는 약간 새벽6시 정도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당연히 그런건 여자가 해야죠.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는게 아니예요.' 같은 소리를 해도 '옛날 사람이네.' '남존여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네 .' '고리타분한 놈이네' 정도의 뒷담화까지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소리지만 말이다. 지금은 그 집단에서 매장될 것이 두려워 감히 생각조차 해서는 안되는 말들도 가능한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적 배경 때문에 출제자가 의도한 정답은 분명했다. "당연히 남자가 해야죠."가 내가 해야 될 말이었다. 실제로 나는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남자가 해야죠."라고 대답했다. 현장 분위기는 박장대소였다. 남자 교사를 가리키며 남자가 할 거라는 분명한 약속을 받아내는 이도 있었다. 현장 분위기는 최고였다.
그런 추억이 있었다는게 오늘 문득 갑자기 떠올랐다.
뜬금없이 10여년만에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남자가 해야죠."라는 정답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해가 있을까 첨언하자면 당연히.... "그런건 여자의 일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는게 아니다. 지금도 그렇고, 그 때도 그랬고... 나는 분리수거라던지, 집안일이라던지 등등을 여자의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오늘 갑자기 문득 떠올라 기록을 하고 싶기에 적어본다.
나는 "남자가 해야 한다. 여자가 해야 한다."라는 말 자체가 잘못이다. 라고 진지하게 답하고 싶었다. 그랬다면... 출제자가 기대한 정답도 아니고...그렇다고 오답(여자가 해야죠)도 아닌 판을 깨는 답이었기에 즐거운 피로연 분위기로 찬물이 끼얹어졌겠지만... 그래서 그저 정답을 말할 수 밖에 없었던거다.
우리 몸이 더러워 졌다고 해 보자. 오른손으로 씻어야 할까? 왼손으로 씻어야 할까?
정답은? 오른손잡이는 오른손, 왼손잡이는 왼손일까? 아니다. 어느 한쪽을 고르는 것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문제를 발생시킨다. 당연히 양손으로 씻어야 한다. 이 때 우리는 오른손이 도와준 거라거나 왼손이 도와준거라고 하는가? 아니다. 그냥 양손으로 씻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한걸음 더 들어가야만 한다. 우리가 몸을 씻을 때 그럼 양손이 함께 씻었다고 말하는가? 절대 아니다. 영어 문명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란가 모르겠지만 우리 문화에서는 전혀 아니다. "내"가 씻었다고 한다.
나 어제 양손이 내 몸을 씻겨줬어...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눈쌀을 찌푸리게 될 것이다. 내가 내 몸을 씻는 거지 양손이 함께 씻겨주는게 아니다.
그럼 다시 그 때의 나로 돌아가 본다.
결혼이란 두 사람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너와 내가 만나 하나의 내가 되는 것이다. 그럼 집안일은 누가 해야 되나... 남자가? 여자가? 아니면 같이? 반반 나눠서?
모두 틀렸다. 함정에 빠지면 안된다.
정답은 결혼 후 집안일은 "내"가 해야만 한다. 물론 여기의 "나"는 혼자 살 때의 "나"와는 다른 "나"이다. 결혼 후 하나가 된 "나"이다. 같이 하는 개념과는 다르다. 집안일을 n분의 1해서 나누는게 아니다. 타인과 동거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평등하게 분배해서 같이 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누는 것은 반드시 불평등으로 귀결된다.
"내"가 해야만 한다. 결혼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과 아내 모두 "음식물 쓰레기는 누가 버려야 하나요?" 라고 했을 때 그건 당연히 "내"가 해야지요. 라고 하는 부부가 바로 다름아닌 "부부"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살림을 할 때 업무의 효율을 위해 일을 전담해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음식만들기를 도맡아 하고, 화장실 청소는 아내가 하는 식이로. 왜냐하면 반복해서 같은 일을 하면 "요령"이라는게 생기고 "자동화"가 되기에 엄청나게 보이는 능력을 적은 힘으로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지에 이르게 되느까 말이다. 하지만 이 때에도 중요한 것은 부부 중 어느 한명이 "나 혼자 도맡아 한다."라는 생각으로 하는게 아니라 "그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말하는게 핵심이다.
경직된 가부장제 사회였던 예전의 가정이 훨씬 잘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가 뭘까? 휠씬 평등이 강조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비약적으로 상승된 요즘에 예전보다 이혼으로 귀결되는 가정이 많은 것은 왜일까? 한쪽 성이 억압받고 착취받으며 억눌려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진실을 깨닫고 자유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집안 일을 "내"가 한다는 생각으로 남편과 아내 모두 살아갔기 때문에 부부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Q:돈은 누가 벌어와야 해? A:돈은 무슨 일이 있든 내(남자)가 벌어와야지.
Q:요리는 누가 해야 해? A:내(여자)가 해서 차릴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남자일, 여자일을 나눠야 한다는게 아니다. 남자일, 여자일을 구분하려는 생각자체가 부부라는 신성(!!!)한 개념과 전혀 맞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가정을 살리는 것은 남녀역할로 바라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일이다.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그건 "내"가 해야되는 일이야. 라고 말하는게 바로 부부의 언어이고, 부부의 언어를 쓰는 새로운 개체를 이루는 것이 결혼이라는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나저나 이런 진지한 말을 그 때 했었더라면.... 피로연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은 시간을 돌려보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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